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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순 수필가

요즘 없던 버릇이 생겼다. 폐품 수거장에 가면 쓸모없어 버리는 물건들을 눈으로 스캔하는 일이다. 윗집이 이사하면서 버린, 바퀴 달린 화분 받침 셋을 주워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베란다 화초들이 바퀴 달린 받침을 사용하고부터 물 빠짐이 좋아 잎에서 윤이 나고 개화기의 수명도 길어졌다.  
 그러다 보니 이곳저곳에 건져 올린 가재도구가 늘어났다. 안방 경대 옆에 얌전히 서 있는 베이지 톤의 미니 책장과 소량의 김치를 버무릴 때 쓰고 있는 큼지막한 스틸 대야도 들고 온 것이다. 생각잖게 건져 올린 습득물을 요긴하게 쓰고 있으니 '보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며칠 전에 건진 수확물도 쏠쏠하다. 만화책 한 질과 문학 전집 몇 권을 건져 올렸다. 이원복 교수의 만화를 즐겨 읽었던 터라 '맹꽁이 서당' 역사 만화 한 질을 보자 얼른 손이 갔다. 방대한 분량의 '세계문학 전집'도 출판 연도는 꽤 됐지만, 손 많이 타지 않은 새것이어서 읽고 싶은 것 몇 권을 골라왔다. 
 허리를 다쳐 병원에서 3주가량 누워 있으라는 처방을 받았다. 할 일 없이 바닥에 등 붙이고 누워있자니 보통 좀이 쑤시는 게 아니었다. 
 읽을거리를 찾다가 보물창고에서 건져 올린 만화에 생각이 미쳤다. 지루함을 죽이기에는 만화만 한 것은 없지 싶어 한 권을 빼 들었다. 활자가 크고 내용도 가벼워 누운 자세로 시간 때우기는 그만이었다. 만화 속 문동(文童)들 틈에 끼어 훈장의 재미나는 고사 풀이와 역사 공부를 하노라니 아픔도 잊고, 만화 속에 빠져들었다. 잊힌 역사 지식이 퍼즐 맞추듯 살아나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도랑 치고 가재 잡는다는 말은 이런 경우가 아닌가 싶었다. 

 완쾌 후 단골 미용실에 가 만화 자랑을 했더니 자기도 꼭 보고 싶다기에 만화책을 고스란히 가져다주었다. 폐기 직전의 책이 내 작은 관심으로 새로운 독자를 만나 생명을 연장하고 있으니 이게 보물찾기의 핵심이 아닐까. 예상 못 한 보람이었다. 책은 생명 연장해서 좋고, 내게는 잊힌 역사 지식을 되새길 수 있어 좋았다. 

 나는 버리는 데 익숙하지 않다. 대단한 절약 정신이 있어서라기보다 어려서부터 길든 습관이다. 어머니가 그러셨다. 곡식 낱알 하나라도 함부로 하는 건 농부의 수고를 외면하는 처사라고. 내가 중고품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도 맥을 같이한다. 수명이 다한 것도 몇 번 거름 질을 한 다음 처분한다. 

 잠시 마음이 흔들린 적이 있다. 정신 건강 권위자의 강의를 들으면서부터다. 강의 주제는 '수고한 나를 대접해주라'는 요지였다. 내가 아니면 누가 나를 돌보아주느냐는 말속에는 그러지 않으면 훗날 후회할 거라는 암시가 담겨있는 듯했다. "단 한 번뿐인 인생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여행 가고 싶으면 하라. 자식이, 남편이 해주길 바라지 말고 스스로 자신에게 해 줘라" 이 말이 강한 설득력으로 다가왔다. 
 생각해 보니 내 몸에 새 옷을 걸쳐 본 적이 드물다. 내 삶의 방식이니 불만도 없었다. 허나, 세월이 흘러 혹시라도 회한이 남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백화점으로 돌렸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듯, 해보지 않은 일을 하려니 쉽지 않았다. 도대체 나에게는 어울릴 것 같은 옷을 찾지 못해 빙빙 몇 바퀴를 돌았다. 이대로 돌아갈 순 없지 싶어 내친김에 질렀다. 약간 굽이 있는 구두, 검은색 바바리, 은회색 핸드백, 내 딴에는 거금을 들여 샀다. 

 집에 돌아와 호기롭게 사들인 그것들은 거울 앞에서 입어보았다. 역시나 어설퍼 보였다. 큰맘 먹고 지른 그것들은 몸값을 못 하고 장롱 속에 잠자고 있다. 그걸 떨쳐입고 나갈 일이 없다. 애써, 그게 버린 시간은 아니었다고 자위한다. 한번 해 보았으니 장래에 불거질지도 모를 후회를 잠재운 셈이다. 역시 나는 날이 선 새것보다는 길든 친구 같은 중고가 편하다. 그게 내 체질이니 회한이 있을 수가 없다.  

 집 근처에 '아름다운 가게'가 문을 열었다. 사회적 나눔 실천 현장이다. 찾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내게는 필요 없지만,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물건을 기증받아 운영되는, 이름만큼이나 의미 있고 아름다운 가게다. 판매 이윤은 자선기금으로 선용된다. 용처도 아름답지만, 필요한 사람에겐 입을만한 옷, 생활용품을 저렴하게 제공하고 있으니 찾는 이들에게 경제적인 도움도 준다. 책 한 권 값이 새 책의 반값도 안 된다. 부담 없는 가격에 책을 사 좋고, 쇼핑 기분 낼 수 있어 좋다. 
 내가 이 작은 행위로 누군가를 돕는 일에 동참하고 있으니 이 또한 보물창고의 순기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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