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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수 수필가
이상수 수필가

낮의 길이가 훌쩍 줄었다. 어둠은 점점 빨리 다가오고 달력은 이제 한 장밖에 남지 않았다. 한 해의 계획과 다짐을 적었던 새해 첫날의 결의가 위태롭게 매달려있다. 더 부지런해지고 더 상냥해지리라. 매번 반복되는 다짐 앞에 올해도 어김없이 고개 숙이며 초라하게 선다. 


 카푸아는 나폴리에서 북쪽으로 26Km 떨어진 곳에 있는 이탈리아의 고대 도시다. 이곳은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로마군의 겨울 숙영지였다. 그들은 풍족한 이 땅에 머무르며 육체와 정신이 유약해져 결국 적에게 대패하고 만다. '카푸아적인 것'은 톨스토이가 만든 용어로써 무사태평하고 나태한 시절을 뜻한다.


 하루가 48시간이었으면 좋겠다고 여긴 적이 있었다. 몸이 열 개쯤 되어 해야 할 일을 나누어 처리해내면 어떨까? 주부, 직장인, 딸, 아내, 엄마, 며느리의 역할을 하나씩 맡아준다면 나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종종걸음도 느긋한 팔자걸음으로 치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여명과 함께 일과가 시작됐다. 두 시간 동안의 전화학습관리가 끝나면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 유치원에 보냈다. 사무실에 출근해 회의하고 오후에 방문할 학생들의 교재를 준비했다. 대면 수업이 끝나면 깜깜한 거리를 달려와 늦은 저녁을 챙겼다. 한참 자랄 때라 아이는 병원에도 자주 갔고 틈틈이 시댁 방문도 빼놓을 수 없었다. 사고라도 나서 딱 일주일만 병원에 누워있었으면 하고 바랐던 적도 많았다.


 얼마 전, 누구보다도 열심히 산 친구의 부고를 들었다. 새벽 우유배달과 일주일에 세 번 김밥집 아르바이트, 화장품 외판을 하면서도 어르신들의 목욕봉사도 열심이었던 그녀였다. 생전의 부지런함은 우리 모두의 게으름을 뒤돌아보게 했다. 그런 그녀가 바쁜 중에도 잠깐씩 자신만의 카푸아에 머물렀다면 더 오래 우리 곁에 남지 않았을까.


 8월 10일은 '세계 사자의 날'이자 '게으름의 날'이다. 아프리카 평원의 여름은 말 그대로 이글이글 끓는 듯한 용광로 속이다. 그 뜨거운 날씨 속에서 사자는 하루에 대략 18~20시간 정도 자는데, 때로는 24시간 내리 졸기도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아마도 사자는 다음 사냥을 위해 카푸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리라.


 바라던 대로 일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었다. 시간이 48시간으로 늘어났다. 아침 먹은 그릇을 개수대에 담가놓거나 볕 좋은 날에 빨래를 말리지 않아도 아쉬울 게 없다. 집안일 가득 쌓아놓고 집 앞 카페에 앉아 느리게 흘러가는 동네 풍경을 보기도 한다. 가끔 여름 아프리카 평원의 사자를 떠올리며 게으른 하품을 물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가 불안했다. 머릿속은 언제나 동선을 계산했는데 꼭 해야 할 무언가를 빠트린 느낌이었다. 기억장애를 겪는 환자처럼 여유 시간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되는 걸까? 얼마나 더 바쁜 시간이 닥쳐오려고 이렇게 여유가 넘쳐나는 것일까?


 호주 소설가 로버트 디세이는 '게으름 예찬'에서 느긋하게 있을 때 우리는 가장 치열하고 유쾌하게 인간다울 수 있다고 했다. 최재천 교수는 깨어 있는 동안 쓸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 애써 잠을 청하거나, 넋 놓고 있는 시간이 낭비라 생각한다면 당신은 너무 열심히 살고 있다고 말한다. 행복하기 위해 게으름을 피워야 하는 게 아니라 게으름을 피우기 위해 행복해야 한다며. '안나 카레니나'에서 레빈의 아내 키티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생활에 완전히 만족했다. 아내이자 한 집안의 안주인이 되고, 뒤이어 아이들을 거느려 교육을 시켜야 하는 시기가 오기 전에 본능적으로 게으름과 사랑의 행복한 순간들을 마음껏 향락하고 있었다. 


 폭풍전야는 고요하고, 부지런한 봄이 오기 전 겨울은 휴지기에 들어간다. 나는 지금 카푸아에 머물고 있다. 로마 군인들은 이곳에서 너무 나태해져 참패하고 말았지만 나는 그들의 잘못을 되풀이하진 않을 것이다. 
 이제 조금 있으면 많은 것들이 물밀듯 밀려올지 모른다. 건강이 나쁜 부모님과 아직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아이들의 장래까지.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리라 다짐하며 남은 커피를 홀짝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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