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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청운고 1학년 천원영
현대청운고 1학년 천원영

2021년, 올해는 무언가 많은 것을 상실한 시간이다. 그렇기에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많고 많은 잃어버린 것들 중 굳이 하나를 꼽자면, 나는 '자유'를 언급하겠다. 인류는 자유를 상실했다. 프랑스 혁명 이래로 단연코 인류 최고의 가치였던 자유를. 


 인간의 존엄성은 언제나 자유의 맥락에서 빛나는 법이다. 우리는 그 고귀한 가치를 위해 생명을 희생하는 것을 불사했고, 또 전부를 포기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헌데 무엇에도 굴하지 않던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현재 한 차례 세계적 전염병이 유행하고 있다. 수도 없이 겪어본 일이다. 페스트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스페인 독감으로 또 수많은 사람들이 숨졌던 것처럼. 그렇다, 병원균들은 분명히 우리의 적이다. 


 그러나 이 문제 때문에 우리는 더 중요한 문제를 잊고 있다. 질병으로부터 안전하길 원하는 현대인들은 국가로부터 보호받길 원하고 기꺼이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한다. 다시 말하자면 자유의 일부를 포기하고, 어느 정도 국가가 개인의 삶에 개입하는 것을 용인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재고해보라. 그리하여 보전한 생명은 자유가 바랜 생명이 아닌가. 어쩌면 지금 우리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맞이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유를 위해 귀한 생명을 희생하던 시대는 지났고, 이제는 신성한 자유를 포기하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 힘을 다하는 때가 온 것일지도.


 400여 년 전, 영국의 정치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사회계약론을 제창했다. '국가를 계약하는 시민'이라는 그의 주장은 틀림없이 급진적이었다. 그로부터 기나긴 시간이 지난 지금의 세계를 완벽히 투영하고 있으니 말이다. 홉스는 태초의 상태를 상상한다. 국가라는 거대한 권력체 없이, 이기적 본성을 지닌 개인들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행동하며 폭력적 성향을 드러내기도 한다. 


 홉스는 이러한 '자연 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규정한다. 극도의 혼란기에 개인들은 안정된 삶과 생존을 위해 계약을 맺는다.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여 국가에 양도함으로써, 생명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받는다. 익숙하지 않은가? 코로나 시대에서 우리는 진정한 '사회계약'을 발견했다. 지금 우리는, 우리를 보호해줄 수 있는 국가를 지지한다. 동선 추적, 자가격리, 능동감시, 사회적 거리두기. 모두 우리의 자유를 제법 침해하는 듯싶다. 그럼에도 전염병이라는 세계적 위협은 '개인의 생존 보장'이라는 목적하에 국가 권력의 확대를 허용했다. 그러니 그로부터 보호받되 경계하라. '리바이어던'의 부활을.


 만약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현재 이 시점은 필연적으로 자유에 대해 논의해야 할 시기이다. 기술 발전의 끝에 우리는 감시 사회를 맞이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적 소설인 <1984>에는 전체주의 사회 속에서 정보 관리를 통해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사회를 통제해 영속적인 집권을 기획한 인물 빅 브라더(Big Brother)가 등장한다. 


 정보통신 기술은 전체주의적 통제의 수단으로 활용돼 모든 시민을 감시하는 거대한 권력으로 변질될지도 모른다. 오늘날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함에 따라 QR 코드나 위치 추적 어플리케이션, 안면 인식 기기 등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전면적인 추적이 행해지고 있다. 스마트폰은 사용자들의 모든 생활 패턴을 기록하고 정보를 모으고 분석하는 가장 효율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 


 빅브라더는 정말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유발 하라리 교수는 "코로나 사태 이후 빅 브라더가 등장할 것이다"라고 선언했으며, 감시 사회의 도래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일에 무감각하다. 그러니 정말로,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다름 아닌 자유의 감각이 아닐까.


 필자는 지금껏 가치론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물론 코로나는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다만 세속적인 담론에 의해 형이상학적 가치들이 훼손되는 것을 막고 싶었을 뿐이다.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사람의 생명이 좌우되는 상황에서 자유니 존엄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그렇다. 하염없는 탁상공론으로밖에 비추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논담이 허황되다면, 지금까지 인류 문명은 무엇을 좇아왔던 것이겠는가? 한 인간으로서 인간들이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것을 부디 아껴주기를 바라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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