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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창호 울주세계산악영화제 집행위원장·영화감독 

어릴 때 극장에서 70mm 대형 화면(지금의 아이맥스와 같은)으로 봤던 로마의 고대 전차 경주가 인상적인 '벤허'(1959년작), 아랍의 광활한 사막이 장관인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년작)를 잊을 수 없다. 
 
C.G가 없던 시대에 사람들이 직접 마차를 타고 질주한 '벤허'의 전차 경기는 손에 땀이 나도록 박진감 넘쳤으며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보여준 요르단의 '지혜의 일곱 기둥'이라는 이름의 광야는 대자연의 웅장함을 느끼게 해줬다. 
 
얼마 전 김동리 원작의 '무녀도'를 원작으로 만든 애니메이션 영화를 극장에서 봤는데 불이 꺼진 극장 안 어둠 속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애니메이션의 다양한 색감은 결코 TV나 모니터, 스마트폰으로는 느낄 수 없는 강렬함이었다.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감흥이 크다는 것을 누구나 알면서도 극장보다 다른 감상 매체를 선택하는 것은 디지털이 영화를 편리하게 보도록 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예술성을 강조하던 필자는 휴대폰으로 영화를 보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하철 안 옆자리의 중년 승객이 이어폰을 끼고 열심히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고 있길래 무엇을 저토록 열중해서 보고 있을까 궁금해 그 승객이 보고 있는 화면을 슬쩍 내려다보니 바로 내가 감독한 '길'(2004년작)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유명 스타가 나오지도 않고 화끈한 볼거리도 없는 문예적인 영화를 그 사람은 복잡한 전철 안에서 미동도 않고 집중해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휴대폰으로 영화를 보는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화면의 크기가 작아질수록 영화의 시각적 요소인 자연, 배경, 세트, 빛, 색감, 소품, 의상 그리고 중요 요소인 섬세한 연기 등을 놓칠 수 있다. 
 
마치 루브르 박물관에 걸린 모나리자를 몰려든 관람객들 때문에 멀리서 자그맣게 본다면 신비롭다는 모자리자의 표정은 물론 그녀의 흰 피부색이나 섬세하게 그린 옷자락과 주름을 어떻게 느끼겠는가. 
 
코로나로 직격탄을 맞아 관객이 줄어든 극장업계는 넷플렉스 같은 플랫트홈 가입자가 늘어나면서 쉽게 관객 수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대작 SF나 판타지 영화로 유지하는 극장은 그 전성기가 이대로 끝나버리지 않을까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시네마 천국'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의 성장과 함께 했던 옛 극장 건물이 시대 흐름에 따라 허물어지는 장면이 있는데 융단 폭격식 배급을 밀어붙이던 멀티 플렉스 시대는 이제 영화를 각 가정이나 달리는 지하철에서도 보는 멀티 플레이스(Multi-Place) 시대로 자리를 내주고 있는 것이다.
 
대학 시절 서울의 프랑스 문화원 지하에 자리 잡은 작은 상영관을 들어서면 입구에 '르누아르의 방'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영화 예술에 목말라 있던 젊은이들은 불이 꺼진 어두운 장내에 한줄기 빛이 비치며 스크린에 나타나는 화면을 숨죽여 바라봤다. 상영 도중에 잔 기침하는 것도 눈치가 보였고 뒷사람이 보는 화면을 가릴까 봐 고개도 마음대로 쳐들지 못했다. 
 
감독이 내 작품이 상영되는 극장에 자주 가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과자를 먹으면서 바스락거리는 포장지 소리를 내는 관객들을 매 상영 때마다 제지하다가 지치곤 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극장을 교회라고 일컬었는데 많은 관객들에게는 극장이 도서관이자 미술관이 되기도 한다.
 
요즘 메타버스(metaverse)라는 말이 매스컴에 자주 등장한다. 메타(Meta)는 초월이라뮈 뜻의 영어이며 버스는 Universe에서 verse를 떼어내어 합성한 신조어로 현실 초월의 가상 세계를 뜻한다. 쉽게 말하자면 안경을 쓰고 보는 3D 입체 영화도 일종의 가상 세계인데 여기에 아바타가 등장하는 것이 메타버스인 것이다. 
 
영화가 펼치는 스크린 속 세계이든 메타버스가 보여주는 세계이든 중요한 점은 그 매체들이 어떠한 세상을 보여주는가 하는 것이다. 현실 도피를 시켜주는 영상 매체들에 의해 헛된 환상의 세계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오늘을 살아갈 현실의 엄중함과 우리가 살아가는 자연의 귀중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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