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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숙 시인
송은숙 시인

겨울치고도 유난히 추운 날인데, 왜 복숭아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다. 아마 냉장고 과일 칸을 열다 몇 개 남지 않은 단감을 보고 단감 철도 다 지났군, 하며 아쉬워하다가 갑자기 올해는 복숭아 철에 복숭아를 제대로 먹지 못했다는데 생각이 미친 것 같다. 며칠 전엔 집 근처 산기슭에 철모르고 핀 진달래 한 송이를 봤는데, 이상 기온으로 제철이 아닌데 꽃이 피는 거야 이젠 예삿일이 돼버려서 심상하게 지나치다 뜬금없이 복숭아 생각이 나기도 했다. 진달래꽃 빛이 복숭아꽃 색깔을 좀 닮았나, 아무튼 겨울 초입에 여름 과일인 복숭아가 떠오르니 철은 아니지만 복숭아에 대한 생각을 좀 더 궁굴려 보기로 한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요즘 아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이원수의 '고향의 봄'은 어렸을 때 우리가 즐겨 부르던 노래였다. 도시도 농촌도 아닌, 도시 변두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안타깝게도 우리 동네엔 복숭아나 살구나무 과수원이  없었다. 그래도 봄날에 차를 타고 한적한 시골 마을을 지날 때면 이 노래가 실감이 난다. 연분홍 안개가 낀 듯 자욱하게 만개한 꽃 사이로 허름한 집들이 보이면 무언가 아득한 그리움이 밀려온다. 이미 사라진 공간과 시간에 대한 향수 같은 것. 나는 요염한 복숭아꽃보다는 해사한 살구꽃을 더 좋아하지만, 연지를 바른 볼 같이 화사한 복숭아꽃을 보면 '매력'이나 '유혹'이라는 꽃말이 괜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복숭아는 꽃도 꽃이지만 '수밀도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히도록 달려 오너라'는 이상화의 시처럼 모양이나 색깔, 향기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과일이다. 손에 다 잡히지 않는 뿌듯한 크기, 분홍빛이 감도는 연한 과육, 달콤하고 부드러운 향. 복숭아 철이 되면 물복(물렁한 복숭아)파와 딱복(딱딱한 복숭아)파로 나뉘어 소소한 다툼이 일어난다. 하지만 껍질을 벗겨 먹는 부드러운 물복이든 아삭아삭 씹는 소리까지 맛있게 들리는 딱복이든 모두 없어서 못 먹을 만큼 향기롭고 달콤하다. 

복숭아는 밤에 먹어야 맛있다는 말이 있는데 복숭아가 달콤해서 벌레가 많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아마 나도 그동안 복숭아 벌레를 몇 마리쯤 먹지 않았을까. 복숭아를 다 먹은 게 아쉬워서 딱딱한 복숭아씨를 망치로 깨서 속에 있는 씨앗을 먹기도 했는데 아몬드 모양의 씨앗은 텁텁하고 씁쓸해서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복숭아 씨앗 속에 시안화합물이란 독성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훗날의 일이다.

무엇보다 복숭아는 귀신을 쫓는다는 벽사 과일로 알려져 흥미로웠다. 하나라에 때 천자 자리를 빼앗고 악정을 일삼다가 복숭아나무로 만든 몽둥이에 맞아 죽은 사람 이야기가 '회남자'에 나온다는데, 이 일이 있은 뒤부터 귀신이 복숭아나무를 무서워하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제사상에는 절대 복숭아를 올리지 않는다. 그런데 왜 몽둥이가 홍두깨로 사용됐다는 단단한 박달나무나 곤장의 재료였던 물푸레나무가 아니라 복숭아나무로 만들어졌을까.

아마 복숭아꽃이 귀신이 싫어한다는 붉은빛을 띠고, 햇살이 충만한 봄에 꽃을 피우고 여름에 열매를 맺어 그런 게 아닐까. 복숭아는 양의 기운이 넘쳐나는 과일인 것이다. 복숭아 가지는 악귀를 물리치고 병을 낫게 하는 효험이 있다는데, 특히 햇살을 먼저 받는 동쪽으로 뻗은 가지가 더 효험이 있단다. 그래서인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귀신을 쫓는다고 복숭아나무로 사람을 쳐서 사달이 났다는 뉴스가 가끔씩 보도되곤 했었다. 아무튼 복숭아는 주술적 의미가 더해져 신비스러운 느낌까지 주는 과일이다.

울산을 상징하는 처용탈에 복숭아가 달려있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처용문화제 때 뮤지컬 처용무 리허설 장면을 보게 됐는데, 그때 처용탈을 가까이 볼 기회가 있었다. 처용이 쓴 검은 사모 위에 나무로 깎은 은행 같은 게 달려있는데 그게 은행이 아니라 복숭아였다. 검은 사모 양옆엔 붉은 모란이, 위에는 나무로 만든 복숭아가 일곱 개 달려있다. 붉은색은 원래 액막이 색이니 그렇다 쳐도 나쁜 귀신을 물리친다는 복숭아가 한둘이 아니라 무려 일곱 개나 달려있다니, 처용탈이야말로 악귀나 병마나 인간을 괴롭히는 온갖 삿된 것으로부터 보호를 염원하는 대단한 방어막인 셈이다.

겨울이라 그런지 코로나가 좀체로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몸도 마음도 지치고 고단해진 요즘, 그럴 수 있다면 악귀를 물리친다는 복숭아의 힘을 가져다가 코로나 바이러스를 퇴치하고 싶다. 아마 이 겨울에 갑자기 복숭아가 생각난 것도 이런 기대 때문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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