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멀리서 오는 生
 
박주하
 
사무치게 걸었다 
파묻히지 않으려고
길들은 여전히 정처 없고
 
미련은 악착같이 밤을 쌓아 놓았다
어떻게 그 많은 생각을 품고 살았을까
꼬깃꼬깃 접힌 낯선 마음들이
모두 나의 것이라니
생이 점점 무거워진다
 
봄바람을 쪼개어
다시 이곳에 온다면 그때는
아주 작은 풀꽃으로 피어야지
길가 어느 모퉁이에서
머리를 꼿꼿이 치켜들고
 
부끄럼도 없이 그대를 기다려야지
그때는 마음이 아니라
눈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워야지
단 한 번 다정한 눈빛만으로도 행복해야지
 
△박주하: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1996년 '불교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항생제를 먹은 오후' '숨은 연못'을 냈다.

김감우 시인
김감우 시인

주말에 맹추위가 다녀갔다 정신이 번쩍 들면서 복잡했던 주변이 일순간에 아주 단순해지는 것을 경험했다. 계절이 일깨워주는 것이 생각보다 많다. 추위가 기승을 부릴 때는 더운 여름이 있었나 싶다. 올 것 같지 않은 봄을 기다리는 마음 하나 붙들고 얼음판을 지나간다. 한 해가 저문다. 다시 끝자락에 서니 지난 1년을 좀 객관적으로 돌아다 보게 된다. 1인칭 주인공이 아니라 1인칭 관찰자의 자리에서 내가 나를 들여다본다. 

 마스크 속에서도 말이 넘나들고 일이 오가며 상처 난 마음도 어쩌지 못한 채 켜켜로 품고 산 한 해였다. 이 시를 읽으며 아리게 공감한다. 어떻게 이 많은 생각들을 내가 품고 살았을까 싶다. 미련이 쌓아놓은 무수한 밤들도 보인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그래서 스스로에게도 낯설어진 꼬깃꼬깃 접힌 마음들이 나의 것이었다니. 무게에 허우적거리느라, 얽히고설킨 줄에 매달려 있느라, 자신과의 소통의 창을 꽉 닫고 산 건 아닌지. 송년 즈음이라고 여느 때와 별반 다를 게 없겠지만 이 시가 오늘따라 쏘옥 들어오는 건 한 번 비우고 가자는 스스로의 치유방식이 아닐까 싶다. "사무치게 걸었다"라는 첫 행처럼 파묻히지 않으려고 바둥대었으나 길은 여전히 정처 없기만 하다. 비우지 못한 마음들이 사유의 길을 막아선 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순간도 많았다. 어딘가에서 말, 말, 말의 홍수 속으로 휩쓸려간 시간이 부르는 소리가 들리다 사라진다. 문득, 두어 해 전부터 갑자기 말수가 줄어든 한 시인(지인)이 생각난다. 그는 이유를 '말빚' 때문이라 했다. 스스로가 뱉은 말을 다 거두어 갈 수 없다는 깨달음이 자신의 마음을 말보다는 내면을 바라보는 고요 쪽으로 향하게 한 것 같았다. 

 이 시의 시간적 배경은 하루 중 저녁이겠다. 영상을 입힌다면 일몰의 풍경이 좋겠다. 영화 '변산'을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것은 노을밖에 없네" 오늘은 주방에서 문득, 거실에서 문득 일몰을 만나고 싶다. 그리고 "봄바람을 쪼개어 다시 이곳에 온다면 그때는"의 다음 대사를 잠시 그려봐야겠다. 김감우 시인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