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미의 시간
보내미의 시간
  • 이상수
  • 2022.01.20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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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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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수 수필가

헛간이 기지개를 켠다. 겨울잠에 들었던 땅이 천천히 깨어날 시간이다. 방울새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오고 공기 속에 연둣빛 봄의 알갱이들이 떠다니는 듯하다. 이맘 때면 아버지는 쟁기를 꺼내 지게에 얹고 소와 함께 밭으로 나갔다. 
 보내미는 예비 밭갈이를 말한다. 본격적인 농사가 시작되기 전, 겨우내 외양간에 웅크리고 있던 소가 건강한지, 작년에 쓰던 쟁기 줄은 삭지 않았는지 밭을 갈며 미리 점검해보는 것이다. 

 아버지의 보내미는 언제나 지난해의 묵은 흔적을 지우며 시작됐다. 말라버린 콩대와 들깻단을 거두어 밭 가운데 쌓아 올리고 불로 태웠다. 밭 한쪽 땅에 묻어 저장해 놓았던 무를 모두 꺼내고 대파를 뽑아냈다. 둔덕에 매어두었던 소를 끌고 와 멍에를 올리고 쟁기를 다는 것이 마지막 준비작업이었다. 겨우내 헛간에서 한 계절을 쉬었지만 멍에는 잘 맞았다. 

 봄 파종은 서두르다 망하고 가을 파종은 늦추다가 망한다고 아버지는 속담을 빌려 자주 말하곤 했다. 당신의 농사가 대체로 성공적이었던 이유는 세 단계에 걸쳐 농사를 짓기 때문이었다. 한 번은 머릿속으로, 또 한 번은 농사일지 속에서, 마지막 한 번은 이웃의 농사를 참고삼았다. 평생 농부의 삶을 살면서 이런 준비과정을 대충 건너뛴 적은 없었다. 

 링컨은 나무를 베는 데 여섯 시간이 주어진다면 도끼날을 가는데 4시간을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린 새가 날지 못하는 것은 더 준비하여 날기 위해서라고 한 이는 율곡 이이 선생이다. 목련은 미리 꽃봉오리를 만들어 겨울을 나고, 거미는 먹이를 잡기 전에 미리 줄을 쳐둔다. 그러나 나는 왜 매사에 그러질 못했을까?

 벼락치기는 내게 너무나 익숙한 단어였다. 내 인생의 대부분은 코앞에 다가온 일을 처리하느라 늘 허둥거렸다. 번갯불에 콩 튀겨먹듯 시험을 본 뒤엔 바로 다음을 기약했지만 어리석은 다짐만 반복되었다. 첫 단추가 밀리는 생활은 체계적이거나 꼼꼼하지 못했고 후회로 지나간 일을 메우는 데 거의 모든 시간을 할애하곤 했다.  

 공부하려고 책을 펼치다가도 밖으로 뛰쳐나가는 일이 많았다. 들길과 시냇물과 바람과 구름이 자꾸만 나를 불러냈기 때문이었다. 진득하게 무얼 하기보다는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맸고 그걸 찾으면 이내 싫증을 내곤 했다. 공부는 대충 하고 놀기는 열심이었다. 말괄량이 삐삐 같았다고나 할까. 엄마의 말에 따르자면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계집아이였다. 

 이랴! 아버지의 힘찬 목소리와 함께 느슨했던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쟁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100m 출발선에 선 우리에게 울리던 딱총소리 같았다. 굳게 웅크리고 있던 땅이 힘차게 깨어났다. 밭을 다 갈고 나면 곰방메로 흙을 곱게 부수고 골을 타 이랑을 만들었다. 평평한 이랑에는 뿌리가 깊어 가뭄에 강한 콩 종류를 심고 뿌리가 약해 가뭄을 잘 타는 채소는 높은 이랑에 심었다. 온도는 물론 일조량이나 토질에 따라서 작물을 골라 파종했다. 옥수수나 당근 같은 것은 연작피해가 적지만 상추나 시금치는 한 해마다 돌려짓기해야 하므로 더 많이 신경을 썼다.

 전 세계적으로 1억 1만 부 이상을 판매한 '다빈치 코드'의 작가 댄 브라운은 그 책을 쓰기 위해 도서관에 소장된 책의 절반가량을 읽고 참고했다고 한다. 김연아의 울퉁불퉁한 등 근육과 짓무른 강수진의 발은 최고의 무대를 보여주기 위한 준비가 얼마나 철저했나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글쓰기에도 만만찮은 사전준비가 필요하다. 꼼꼼하게 자료를 모으고 튼튼한 글 뼈를 잡아야 한다. 그 바탕 위에 설명과 묘사를 하고 퇴고를 게을리하지 않아야 이윽고 한 편의 글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대체로 즉흥적이었고 깊이 사색하지 못했다. 그러니 글은 늘 약점투성이였다. 

 본 곡을 연주하기 전에 속도와 호흡을 조절하기 위하여 짧은 곡조를 연주하는 '다스림'이나 판소리를 부르기에 앞서 목을 풀기 위한 단가(短歌)의 기능도 이와 같으리라. 봄이 되면 겨울잠 자는 벌을 번식시키기 위해 화분 떡을 올리고 깨우는 일이며 거름을 내고 종자를 준비하는 것도 일종의 보내미에 속한다 할 것이다. 

 수많은 출발은 지금 보내미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다음 학년으로 진급하는 학생, 사회로 진출하려는 졸업생, 새로운 가족을 이룰 선남선녀, 가게를 열려는 예비창업자 등. 그들이 준비한 착실한 시간만큼 알찬 성과 이루기를 기원해 본다.
 이제 나도 본격적으로 글밭을 갈려 한다. 묵은 가지도 걷어내고 밑거름도 주어 제대로 된 튼실한 글들을 수확하길 꿈꾼다. 소와 함께 밭으로 나가는 아버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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