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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재 행복학교 교사

몇 년 전까지 우리 집에는 열어야 할 때마다 매 순간 망설여지는 문이 있었다. 그 문은 장롱문이다. 장롱문을 열면 전체 집 안 분위기와 이질적인 다른 차원의 세계가 펼쳐진다. 
 
장롱 속에는 10대 시절부터 차곡차곡 모은 옷들, 친구와 비밀을 주고받았던 비밀 교환 일기장(비밀 내용이 상당히 얄팍해 자물쇠 존재에 대한 의문이 생김), 왜 주고받았는지 기억조차 없는 친구들의 증명사진 등이 얽히고설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소원의 돌탑처럼 쌓은 세월들은 장롱문을 열고 닫을 때 부는 바람에도 무너질까 봐 살살 달래야 했다. 
 
필요한 물건이 있어도 쉽사리 꺼내지 않았다. 물건의 생존 여부만 확인하고 문을 닫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덜어내야지. 덜어내야지'하며 하루하루를 제치던 어느 날 본교에서 '유네스코 학교' 업무를 맡으면서 의도치 않게 깨닫게 된 바가 있어, 장롱 속 추억들을 덜어내게 됐다. 
 
'학교 업무가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삶에 훅 들어와 소용돌이를 일으킬 줄이야'라고 속으로 읊조리며 손을 뻗어 묵혀둔 장롱 속 물건들을 꺼내서 분류했다. 
 
목이 늘어나 나풀 나풀거리는 티셔츠, 비밀이 없는 비밀 교환 일기장, 도저히 인간의 모습이라고 볼 수 없는 15등신 종이 인형, 짝을 잃어 외로운 왼쪽 손가락장갑 등의 물품들은 종량제 봉투와 만나는 자리를 마련했다. '잘 가 얘들아, 삼 척 남짓한 장롱 속에서 허리 한 번 못 펴고 살게 했던 못난 주인을 용서하지 마'라며 쿨한 마지막 인사도 잊지 않았다. 그 외에 깨끗하고 재사용이 가능하다고 판단되는 물건들은 따로 모아 뒀다. 모아둔 이유는 내가 깨달은 바를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유네스코 학교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자면, 유네스코 학교란 인권, 평화, 지속가능발전교육, 세계시민교육과 같은 유네스코의 이념을 학교 교육에 통합해 수행되는 양질의 교육(삶의 질을 개선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우수한 교육)을 통해 유네스코 학교 구성원들이 함께 참여하고 학습하는 학교이다. 쉽게 말하자면, 교육을 통해 사회적으로 합의된 규칙을 준수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시민을 길러내는 것이다. 
 
본교에서는 유네스코 학교 네트워크 활동으로 유네스코 학교 한일 교사 교류, 텃밭 가꾸기, 명상 숲 조성, 기부 등을 실천했다. 여러 활동들이 모두 의미 있었다. 그중에서 텃밭 가꾸기는 농사의 재미를, 기부는 우리집 장롱에게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줬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농사도 기부의 일부로 볼 수 있다. 손수 재배한 과채는 생각보다 수확량이 많았다. 학생 편으로 집으로 몇 차례 배송하고 수업 시간에 온갖 요리를 해도 뒤돌아보면 또 주렁주렁 열렸다. 화수분처럼 열리는 농작물을 아낌없이 다른 반에 기부하면서 서로 간 따뜻한 정을 나눴다. 가지, 오이, 애호박, 고추, 참외의 정이 넘실넘실 넘쳐났다.  
 
교내에서 나눠 두터워진 정을 교문 밖을 넘어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어졌다. 여러 단체와 사회적 기업들을 알아보았고 그중에서 '아름다운 가게'라는 곳을 선정했다. 아름다운 가게는 물건의 재사용과 순환을 통해 우리 사회의 생태적·친환경적 변화에 기여하고 국내외 소외계층 및 공익활동을 지원하며, 시민의식의 성장과 풀뿌리 공동체 발전에 기여하는 공익성과 전문성을 갖춘 세계적 수준의 NGO(Non-Governmental Organization) 단체이다. 
 
유네스코 학교에서 추구하는 이념과 일맥상통하기에 별다른 고민 없이 아름다운 가게를 통해 기부를 결정했다. 기부할 수 있는 물품은 의류, 생활·주방 잡화, 디지털 기기, 도서·음반 등으로 다양했다. 이 중에서 한 가지 물품을 택해 학생 및 교직원들로부터 기부를 받았고 모인 물품을 아름다운 가게로 보냈다. 학생들은 본인의 손길이 닿은 물품들이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전해진다는 사실에 뿌듯해했다. 몇몇 학생은 물품을 기부하면서 '좋은 주인 만나. 잘 가'라는 마지막 인사를 잊지 않았다.   
 
기부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공장에서 나온 끼끗한 새것이 아니더라도 빳빳한 지폐가 아니더라도 가능하며 이를 통해 폭신폭신한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할 수 있다. 오늘도 나는 장롱문을 거침없이 활짝 열고 닫으며 새어 나오는 바람을 쐰다. '덜어내면 편하다. 덜어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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