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진 길
끊어진 길
  • 정경아
  • 2022.01.27 17:05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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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를 읽는 금요일] 정경아 수필가
정경아 수필가
정경아 수필가

"저 할머니야!"

남편은 회사 앞 녹색 그물을 뒤적거리는 할머니를 발견하자마자 차에서 내린다. 제대로 주차할 겨를도 없다. 엔진은 공회전하며 웽웽거리고 비상 깜박이는 요란하게 끔벅인다. 자동차 전조등은 이웃집 대문을 향해 두 눈을 치켜뜨고 감춰진 무언가를 찾는다. 

CCTV 속의 할머니였다. 낮에 찍혔던 자줏빛 경량 패딩이 분명하다. 등에는 세월의 자루 같은 등뼈가 튀어나왔다. 잿빛 털모자와 흰색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도 잔뜩 움츠러든 자세는 CCTV 속 그 한낮의 소요를 설명하기 충분하다.

남편 회사는 실내 온도나 습도 따위의 공기 상태를 알맞게 조절하는 공조기를 만든다. 기계부품은 거의 다 고철이라 튼튼한 종이 박스에 담겨온다. 질이 좋은 종이를 얻기 위해 폐지를 줍는 노인들이 회사에 분주히 다녀간다. 남편은 종이 박스를 모아뒀다가 그들에게 나눠줬다.

쿨러 2개를 회사 입구에 뒀다. 거래처 사람이 물건이 찾으러 왔을 때는 기계가 감쪽같이 사라진 후였다. 샅샅이 뒤지고 수소문했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CCTV를 돌려봤다. 화면 속 할머니는 좌우로 한 번씩 살폈다. 가게 입구까지 들어와 쿨러를 끄집어내, 솟아 나와 있는 구릿빛 동관을 머리채처럼 잡아 바닥에 질질 끌었다. 1m나 되는 사각 고철을 두 개나 끌고 거친 걸음을 재촉했다.

퇴근 후, 남편은 나와 함께 회사로 갔다. 불 꺼진 회사 앞에서 하루 종일 찾았던 할머니와 마주쳤다. 할머니는 남편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옆으로 비켜섰다. 

"그거, 직원들이 가져가라고 했어" 

할머니는 방금 전까지도 플라스틱을 분리수거하는 그물에서 꺼낼 갈 것이 있는지 살피고 있었다. 기계의 행방은 아직 묘원하다. 할머니는 고철 폐기물인 줄 알았다고 했다가 직원들이 줬다고 했다며 계속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이라는 돌은 마음속 수면 위에 의문이라는 잔물결을 그려낸다. 대화는 헛바퀴만 돈다. 경찰에 신고할 수밖에 없다고 하자 그제서야 할머니는 기계가 있는 곳이 생각났는지 발걸음을 서두른다.

옆집 마당에서 잃어버린 물건이 나왔다. 남편은 그 집 주인이 절도를 한 할머니를 알지도 본적도 없다고 화를 내던 모습을 떠올렸다. 

할머니는 두 손으로 기계를 들고나온다. 랩으로 야무지게 감싼 기계는 누가 보아도 고철 폐기물로 보이지 않는다. 나는 정리되지 않는 마음을 뒤집어쓰고 나머지 기계도 들고나왔다.

날이 밝으면 기계를 작동해 보고 고장이 났으면 변상을 해야 한다고 하자 할머니는 눈물을 떨군다. 진정성이 없는 눈물은 잘못된 상황을 면피하려는 도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거짓을 입막음하기 위한 낙루(落淚)만이 자신을 지키는 껍데기로 남았다. 메마른 도시에서 연약하고 낡은 보호막이 언제까지 유효할지 알 수 없다.

끝까지 잘못을 시인하지 않았지만 상황은 일단락됐다. 할머니는 인도를 따라 걷는다. 넓고 평평한 자동차 도로에 비해 인도는 좁고 울퉁불퉁하다. 등에 짊어진 삶의 무게 때문인지 자꾸만 왼쪽으로 기운다. 빈손은 허전하다. 

하루 종일 폐지를 수거하는 일보다 어쩌다 만난 고철 덩어리가 더 돈이 된다면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들 일인 걸까. 양심과 맞바꾼 고철의 요행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 블록 후 보도가 끊어졌다. 위태롭게 도로를 건넌다. 절도를 해야 할 만큼 끊어진 삶의 길에 선 노인의 겨울나기는 홍수에 불어난 강처럼 건너가기 막막해 보인다. 

간판 조명들이 거리에 눅진하게 내려앉는다. 도로에는 자동차의 전조등이 어둠을 밝히며 빠르게 지나간다. 노인이 걸어간 자리에는 짙은 어둠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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