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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왕생이
오병훈 수필가

시골에 사시는 누님께서 곶감 한 접을 보내왔다. 백 개의 감을 깎고 가을 내 말렸을 노고를 생각하면 차마 먹기 아깝다. 접시에 몇 개를 담아 식탁 한 켠에 올려놓았다. 목기에 감을 담아 홍시가 되기를 기다릴 때보다 더 정겹다. 전에는 감이 주렁주렁 매달린 가지를 벽에 걸어두고 익기를 기다린 때도 있었지.
 
감나무 없는 마을이 어디 있을까마는 내 고향은 감이 많이 나는 감골이다. 집집마다 곶감을 몇 동씩 했으니 얼마나 감나무가 많겠는가. 감 한 접은 백 개이고 백 접이면 한 동이다. 만 개의 감을 깎고 말려야 곶감 한 동이 된다. 상강 한로가 지나 감이 누렇게 익으면 장정이 나무 위로 올라가 광주리에 따 담는다. 감은 뾰족한 꼭지를 남기고 껍질을 벗긴다. 줄에 매달기 위해서이다. 졸다가 손가락을 다치기도 하지만 밤이 이슥할 때까지 감을 깎아야 하는 고된 작업이다. 식구들이 하나 둘 잠자리에 들면 가장도 일감을 윗목으로 밀쳐놓고 고단한 삶에서 벗어나 꿈을 좇는다.
 
줄줄이 매달아 놓은 감은 껍질이 마르면서 속은 홍시가 된다. 좋은 곶감을 만들기 위해서는 제 때에 감을 따야 한다. 덜 익은 감은 당도가 떨어지고 분이 잘 나지 않는다. 너무 많이 무른 감은 마르면서 초가 되기 쉽다. 감을 깎아 말리면 겉은 갈색이 되지만 속살은 고운 살빛이다. 줄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꾸덕꾸덕 마르면 표면에 하얀 시설이 내린다. 줄에서 내려 독에 담아 두면 과육에서 하얀 당분이 드러나게 되는데 시상이라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시설이 내비치기 시작하면 곶감을 한 접씩 포장한다. 독에 담아 그늘진 광에 저장하면 여름철 풋감이 나올 때까지 보관할 수 있다.
 
감은 사철 제사상에 올라가는 과일이다. 대추 밤 배는 어느 때라도 먹을 수 있지만 감이 문제이다. 홍시는 오래 보관할 수 없다. 가을과 겨울에는 연시를 제상에 올리지만 봄 여름에는 곶감을 쓴다. 저장한 곶감은 당분이 서리처럼 돋아나 오래 두면 함박눈처럼 피어오르고 손가락으로 만지면 우수수 떨어진다. 손에 묻은 것마저 아까워 입에 대면 솜사탕처럼 사르르 녹는다. 아름답고 귀한 것들은 왜 이토록 빨리 사라지는 것일까.
 

돌감은 씨가 여덟 개나 들어 있어 먹기 거북하다. 그러나 곶감을 만드는 둥시는 굵고 길쭉한 타원형이며 씨가 없거나 많아야 세 개 정도 들어 있다. 오래도록 재배해 오는 동안 더 크고 씨가 없는 것을 선발한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다. 물론 둥시도 홍시가 되지 말란 법 없다. 잘 익은 홍시는 껍질이 얇아서 반으로 가르면 단물이 흘러내리므로 그냥 야만스럽게 한 입에 물고 과즙을 빨아야 한다. 
 

홍시를 먹을 때 입에 남는 씨를 뱉을 필요는 없다. 입안에서 혀끝으로 살살 굴려가면서 씨에 붙은 얇은 살점까지 발라내면 쫄깃하면서도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래서 홍시는 치아가 부실한 노인도 즐겨 먹을 수 있다. 바로 효를 간직한 과일이라 했던가.
 
어릴 때 여남은 살 누나는 어린 동생을 위해 홍시를 주워왔다. 그 해에 처음 달린 홍시는 귀할 수밖에 없다. 큰 감나무에서 떨어진 홍시는 온전한 것이 있을 턱이 없다. 감잎 위에 떨어져 납작한 찹쌀떡처럼 퍼져 있는 홍시. 이것을 감잎에 얹어 한 손으로 받쳐 들고 집으로 왔으니. 산비탈 밭에서 집까지 오려면 밭둑을 걸어 내려가 개울을 건너고 다시 언덕을 올라 들길을 걸어야 했다. 누나는 어린 동생에게 줄 홍시가 혹 떨어질까 조심하며 걸었을 게다. 감을 볼 때마다 내 깊은 마음에서 이슬이 맺히는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르겠다.
 

요즘 시중에서 팔리는 반건시는 어떤가. 상자 겉면에 냉동보관하라고 씌어 있다. 실온에 두면 사나흘만에 파란 곰팡이가 슬어 버리게 된다. 이것은 완전한 가공식품이 아니다. 또 곶감의 빛깔을 좋게 한다는 구실로 감타래 아래 유황을 피운 화로를 두어 연기를 쐰다. 이렇게 하면 분이 잘 돋아나지 않는다. 온전한 곶감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무슨 일을 하든 요령을 피지 말고 정당한 방식으로 정직하게 했으면 좋겠다. 하얀 시설이 푸짐하게 돋아난 곶감 하나를 집어 든다. 보내준 이의 고마운 마음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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