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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일태 수필가
임일태 수필가

영업을 재개하기 위해 관공서를 방문했다. 코로나19로 휴업할 수밖에 없었고, 휴업을 오래 할 수 없다고 폐업을 시켰다. 만약 재등록할 경우는 간단하게 처리된다고 했다. 재신청서만 제출하고 기다리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동안 법이 바뀌어 불가능하다고 했다. 재등록도 새로운 법에 따라야만 한단다.

친절한 담당자는 좋은 목적으로 만든 법이니 따라주는 것이 국민의 도리 아니겠냐며 바뀐 법규에 따른 새로운 구비 서류를 알려 줬다. 그 서류의 주요 내용은 칸막이에 사용하는 재료가 불연재이어야 하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 재료의 시험성적서와 납품확인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우리 업소는 요행히 불연재로 만들어져 있었다. 당시에는 샌드위치 패널이 비싸서 인건비는 조금 많이 들기는 해도 경제적인 석고보드로 시공했던 것이었다. 칸막이 재료 일부를 뜯어가서 보여주면서, 샌드위치 패널이 아니라 석고보드라고 담당 공무원이 직접 방문해 확인을 해 보자고 했지만, 규정에 없다며 그 재료의 시험성적서를 구해와야만 한다고 했다. 오래전에 설치한 석고보드라 당시의 시험성적서를 구할 수가 없었다. 석고보드가 불연재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인데 무조건 그 물건의 시험성적서를 구해 오라고만 하니 참 난감했다. 멀쩡한 칸막이를 뜯어내고 다시 설치하더라도 시험성적서와 납품 증명서는 가지고 와야만 한단다.

국민의 안전이 목적이라고 말하면서, 마치 완벽한 서류 구비가 목적인 양 둔갑한 것이었다. 서류를 갖추게 하는 것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일 뿐인데….

몇 해 전 어느 보육원을 지나다가 본 비 오는 날 비옷을 입고 화단에 물을 주는 아이를 본 것이 떠올랐다. 분명 화단에 물을 주는 목적이 화초가 말라 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일 텐데 싶었다. 삐뚤게 비옷을 입고 처연하게 꽃밭에 물을 주는 그 아이는 한눈에 보아도 약간 지능이 모자란 듯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 일을 시킨 사람은 왜 그랬을까?

무조건 매일 오전 한 시간 동안 꽃밭에 물을 줘야 한다고, 단단히 일렀으리라. 목적이 어쩌고 수단이 어쩌고 깊은 생각은 할 필요가 없었으리라. 비가 올 때는 물을 주지 않아도 된다고 설명하고 싶지만, 구체적으로 얼마만큼의 비가 얼마 동안 왔을 때는 물을 줄 필요가 없다고 계량적인 기준을 정하여 설명하는 것도 어려웠을 것이다. 흙의 상태를 점검해 보고 물을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판단할 능력도 없는 아이에게 그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비가 오는 날 물을 주는 피해가 물을 주는 것을 잊어버려 입는 피해보다는 적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잘 만들어진 수단이 어설픈 목적 설명보다 효율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관련 기관의 공무원이 비 오는 날 비옷을 입고 화단에 물을 주는 아이와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당자가 출장을 와서 칸막이 재료가 불연재라는 것을 확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진을 찍어 첨부할 수도 있지만, 결재권자가 그 사진을 인정해 줄지도 의문이고, 정해진 설명서에 따르지 않고 자의적으로 법규를 해석한다고 문책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부정한 방법으로 조작할 가능성도 있는 일을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 만큼 목적을 위한다는 사명감을 가질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불법으로 편의를 제공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오직 정해진 규정에 따라 서류를 챙기는 일이 유일하겠구나 싶다. 후일 감사에서 서류 미비로 문책을 받을 일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노릇이다. 

이래저래 목적보다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우위에 설 수밖에 없다. 오직 글자에 충실해야만 한다. 목적과 수단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국민의 안전이란 목적보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우선이 돼버린 것이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수단이 목적이 돼버린 것이다.

비 오는 날 비옷을 입고 물을 주지 않은 아이도 분명 규정 위반이고 처벌을 내리면 당연히 받아야 하듯, 인허가 등록도 정해진 구비 서류를 갖추지 않은 것은 분명히 법규 위반으로 처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구비 서류란 목적을 위해 꼭 필요한 수단의 목록일 뿐이다. 하지만 목적보다 수단이 우선이 되는 현실은 안타깝기만 할 뿐이다. 

한 번 정해지고 지키기로 약속했다면 비 오는 날에도 비옷을 입고 화단에 물을 줘야만 하는가. 다시 한번 심각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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