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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자꽃이 피었다
 
이화은 
 
무릎이 깨졌을 때도
사랑이 깨졌을 때도
어머니의 처방은 한결같았다
 
한숨 푹 자거라
 
한숨 푹 자는 동안 거짓말처럼
무릎도 사랑도 아물었다
 
잠 밖에서 어머니는
수은 방울 같은 내 눈물을 쓸어 모아
어디다 감추셨는지
 
한숨 푹 자고 나면
눈물은 말라 있고 사랑이 아문 자리에
치자꽃이 피어있었다
 
어머니가 달랜       
모든 상처는 순결했다
 
맑은 시간이
치자꽃의 꽃말*을 우려내고 있다
 
*치자꽃의 꽃말은 '순결'이다.
 
△이화은: 경북 경산출생. 1991년 '월간문학' 등단. 시와 시학상 수상. 시집 '이 시대의 이별 법' '나 없는 내 방에 전화를 건다' '절정을 복사하다' '미간'

박정옥 시인
박정옥 시인

세월이 약이라는 마법의 연고는 시간이다. 몸 밖에 난 상처나 몸 안에 깊게 패어진 상처들도 시간에 몸을 푹 담그고 있으면 아물어 간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단단한 껍질 속에서 서러운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서야 성숙해지는 일이란. 그리하여 날카로운 칼로도 잘 베어지지 않는 고치처럼 단단하게 안으로 여물어진다는 것을 화자의 어머니는 알고 있는 것이다. 번데기는 성충이 되면 잠을 잔다. 한숨 푹 자고 나면 나방이 되어 날아간다. 치자 꽃이 피면 아플 준비를 해야겠다. 치자 꽃 주머니나 유리산누에나방고치처럼 탈바꿈을 지켜보는 것도 응원하는 것도 결국은 어머니이며 어머니가 있어 어머니로 갈 수 있는 향기다. 
 
 백합, 찔레, 해당화, 치자 같은 꽃은 아침 안개 속으로 비치는 연한 햇살 같은 향이 난다. 순결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단어를 표현한다면 이런 꽃들의 어우러진 향이 아닐까. 가을에는 치자 열매를 실에 꿰어 목걸이처럼 걸어 놓기도 하는데 잘 마른 열매를 흔들면 맑은 소리가 난다. 명절에 노랗게 전을 부치기도 하고 타박상이나 삐었을 때 밀가루 반죽을 붙여 붕대를 감고 며칠 지나면 낫기도 한다. 은은한 향기 속에 치유의 마법이 들어있다고 믿어야겠다. 그러므로 '치자 꽃이 피었다'는 것은 쑥과 마늘을 먹고 어두운 동굴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웅녀의 DNA를 보유한 내력 때문이라고 믿어야겠다. 자신을 통제하여 기꺼이 고난을 감수했던 시간은 참혹한 아름다움을 아슬아슬 넘나들며 향을 피워낸다. 
 
 겨울철 산행에서 사방이 온통 무채색인 메마른 나뭇가지에 새파란 열매가 눈에 띄었다. 겨울 숲의 초록주머니, 유리산누에나방고치다. 참혹한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초록주머니, 운전석 창유리에 몇 달씩 두어도 선명하도록 도발적인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물레를 돌려 잣는다면 영원히 바래지지 않는 유리산누에 비단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고치 속을 빠져나온 나방은 불을 향해 또 달려들 것이며, 선택의 반복은 결코 불행이 아니며.  박정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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