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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화 수필가
윤경화 수필가

두 해 가까이 고객의 눈치를 살피며 지내고 있다. 눈만 내놓고 사는 세상이 되어 눈썰미가 없는 나에게는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어지간히 친밀한 사이가 아니고 가끔 만나는 사람이라면 단박에 알아보기는 쉽지 않다. 그것도 여러 사람이 동시에 다가올 때는 상대방의 특징을 찾는 일에 집중할 수 없어 더욱 곤란을 겪는다.

'마스크 여사' 두 분이 왔다. 전에도 우리 가게를 찾은 적이 있는 듯한 분위기다. 하지만 얼굴 가리개에 가려 겨우 드러난 두 눈과 이마만으로는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음성만으로 상대를 알아야 하는 상황이 된 셈인데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경망스럽게 감히 고객님의 눈을 빤히 쳐다보게 되었다.

나는 순간 당황했다. 검고 반짝반짝한 윤기에다 천진스럽기까지 한 두 사람의 눈이 도리어 나를 쳐다보며 웃고 있지 않은가. 거기에다 두 사람의 눈 네 개가 똑같아 보일 정도로 서로 닮아 혼란스러웠다. 한 사람의 눈이라 해도 양쪽의 크기가 조금 다른 경우가 흔하지 않은가. 속수무책의 상황이 갑갑해지려 할 때 한 사람이 유쾌하게 웃으며 "우리 성형외과 동기예요. 같은 의사에게 수술했어요."라고 했다. 동기와 동창이란 말은 자주 듣는 편이지만 '성형외과 동기'란 말은 처음 듣는지라 흥미로웠다.

장난기와 쾌활함이 묻어있는 눈동자를 마주하자 긴장이 풀렸는지 나도 모르게 파안대소하고 말았다. 그녀는 한술 더 떠서 "우스워 죽겠지요?" 하는 게 아닌가. 웃을 일이 적은 세상이 된 지 꽤 되었다. 그래서인지 웃지 않는 얼굴을 그리 이상하게 여기지 않던 차에 마스크 속 그녀들의 입꼬리 방향이 위로 향했을 것을 생각하자 구름이 걷힌 듯 마음이 가벼워졌다. 잠시였지만 오랜 지기처럼 말을 주고받았다.

이태 동안 우린 코로나의 그늘에서 본 적도 없는 그들의 위협적인 분위기에 일상의 많은 부분을 잠식당하면서 지내온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우리는 개인의 자유에 대해 소극적이었는지 모른다. 정부에서 발표하는 매뉴얼에 따르고, 조심하고, 자제하고, 불편함을 참고, 기다리는 일이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답답한 일상에 익숙해지고 있었던 것 같다.

성형외과 동기생은 사십 대의 직장 여성으로 쉬는 날이라 김장 준비를 위해 장을 보는 중이란다. 사전에도 없는 동기생이 된 이유에는 시대의 상황에 공감대가 있었을 테다. 코로나 상황이라 하루를 거의 직장과 가정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보내자니 심리적인 압박감에 시달려 정신과 방문이라도 해야 할 듯했다고 한다. 자구책으로 평소의 콤플렉스였던 짝눈 성형을 시도해 본 것이란다. 능동적인 변신이었으며, 자신감을 얻은 것 같다고 했다. 주변까지도 '밝게 하는 씨앗'이 생긴 듯해 그 여세를 몰아 처음으로 직접 김장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밝은 기운의 씨앗'이란 대목에서 나는 밑줄을 긋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코로나 상황에서 표면적인 문제 해결보다 선결되어야 할 부분이 개인의 내면에 드리워진 그늘이 아닌가 싶다. 그 후유증은 생각보다 클 것이다. 정부나 특정 전문가의 노력만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일이다. 개인의 의지가 전제돼야 정상적인 일상으로의 회복이나 변화된 환경에 적응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마스크 부인들은 감은 듯한 작은 눈을 핸디캡으로 여겼던 모양이다. 과감하게 현대 의술의 도움으로 문제를 감쪽같이 해결한 듯 시원스럽고 아름다운 눈으로 웃는다. 그렇게 얻은 자신감으로 활기를 일으키고 그 기운으로 주변도 긍정의 방향으로 일깨우는 일은 의미가 크다. 현실 문제의 본질을 성형외과 동기생은 공감했던 것일까. 비슷한 기운을 느끼고 있는 듯이 보였다.

사실 팬데믹이 오자 당황한 정부는 물론 언론까지 나서서 세계적인 석학에게 경험하지 못한 미래로 가는 길을 물었다. 매우 전문적이고 고차적인 견해를 말했지만 결국 고난의 시간을 지나 새로운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는 말을 해법으로 해놓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처방은 코로나로 생긴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떨어진 사기를 끌어 올리는 완전한 묘책은 될 수 없다.

마스크 부인들이 보여준 '밝은 기운의 씨앗'에 어쩌면 답이 들어 있을 수도 있다. 최근 주변에서도 움츠리고 있던 몸과 마음을 깨우려는 노력이 번지고 있다. 역사 속의 환란을 건너는 진정한 영웅은 늘 민초들이었다. 평범한 서민들의 자각이 난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위드 코로나' 이후 확진자가 무서운 기세로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밝은 기운은 잦아드는 것이 아니라 확산하고 있다. 그동안 위기를 감당할 정신 무장이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전쟁보다 무서운 희생을 내는 것이 팬데믹이다. 전쟁 영웅은 기념비가 있고, 그들의 용맹이 전설처럼 역사 속에서 시대마다 살아난다. 하지만 팬데믹의 영웅은 좀 다르다. 많은 불안과 불확실성에 시달리며 피폐해진 상황을 국가와 국민이 함께 건넜을 때 가능한 집단 영웅이다. 존재 자체가 기념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스크 부인들의 변화를 위한 소박한 노력에서 긴 시간에 걸쳐 코로나 상황을 건너고 있는 우리의 성숙해진 자세를 보았다. 어쩌면 삶이란 위기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다만 코로나의 상황은 낯설어 통제 방식을 찾는데 시간이 좀 걸리고 있을 뿐이다. 어느 여론 조사에서도 다수의 국민은 곧 팬데믹 상황이 극복될 거라고 믿는다고 했다. 세상은 믿는 대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것은 믿는 쪽으로 에너지를 모으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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