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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숙 시인
송은숙 시인

"작가는 자신의 공간을 만드는 창설자이며, 언어의 땅을 경작하는 옛 농부의 상속인이며, 우물을 파는 사람이며, 집 짓는 목수이다. 이와 반대로 독자는 여행객이다. 남의 땅을 이곳저곳 돌아다니고, 자기가 쓰지 않은 들판을 가로질러 다니며 밀렵하고, 이집트의 재산을 약탈하여 향유하는 유목민이다." 
 '읽는다는 것의 역사' 머리말에 나오는 이 말은 독서라는 행위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작가는 재배하고 독자는 맛본다. 작가는 만들고 독자는 누린다. 누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다독, 정독, 계독, 남독 …. 모두 여러 가지 독서 방법을 나타내는 말들이다. 많이 읽고, 꼼꼼하게 읽고, 주제별로 읽고, 주제와 상관없이 닥치는 대로 읽고 …. 그뿐 아니라 빨리 읽는 속독, 메모를 해가며 상세히 읽는 지독, 차근차근 빠짐없이 읽는 통독, 필요한 부분만 골라 읽는 발췌독 등 독서에는 참으로 다양한 방법이 있다. 이처럼 어떤 행위를 가리키는 낱말이 많다는 것은 그것이 범용성을 갖는 일반적이고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독서 방법이 주로 책의 내용 이해와 관계된 것이라면, 말 그대로 '읽는다'는 기능에 충실한 분류법으로는 음독(낭독)과 묵독을 들 수 있겠다. 음독은 소리 내어 읽는 것이고, 묵독은 눈으로 읽는 것이다. 글자는 표음 기호의 조합이므로 '발화'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니 소리 내어 읽는 음독이 독서의 첫출발인 셈이다. 엄마는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아이는 웅얼웅얼 소리를 내본다. 하지만 아이는 자라면서 이내 조용히 눈으로 읽는 묵독의 세계로 빠져든다. 나이가 들수록 독서는 취향에 좌우되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 된다. 
 그런데 불과 몇 세기 전만 해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독서는 크게 소리 내어 읽는 일종의 '과시'였다. 소리 내어 읽음으로써 비문해자에게 책의 내용을 전달하고, 사교의 장을 마련하였으며, 타자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는 수단이었다. 책 자체가 워낙 귀하고 글을 아는 사람도 드물었을테니 그럴 만도 하다. 묵독이 자리 잡기 전까지 독자란 낭독하는 소리를 듣는 청중이었다.

 물론 묵독이 보편적인 독서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고 해서 음독이 사라진 것은 아니고, 묵독과 음독은 저마다의 장단점이 있다. 묵독은 눈으로, 또 글자가 아니라 문장 단위로 읽기 때문에 빠르게 읽을 수 있고 글의 내용을 폭넓게 상상하고 좀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음독은 오감을 다 사용해서, 글자를 눈으로 읽을 뿐 아니라 발음을 하면서 입술과 혀의 감각, 목구멍의 울림, 자기 목소리를 들을 때의 청각까지 자극되어 기억의 효과가 높다고 한다. 읽으면서 깊이 음미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글 내용을 실감 나게 전달할 수도 있다. 
 조선 시대에도 글 읽는 소리를 통해 선비의 됨됨이와 지식을 가늠했다. '어우야담'에 실린 유명한 야사로 정인지를 흠모한 처녀 이야기가 있다. 담 너머로 들리는 정인지의 글 읽는 소리에 반한 옆집 처녀가 담을 넘어 정인지를 찾아왔다. 정인지는 부모님께 말씀드려 정식으로 혼인 절차를 밟겠다고 약속하고는 이튿날 이사를 가버렸고 버림받은 처녀는 상사병으로 죽고 말았다. 글 읽는 소리에는 단순한 소리 이상의 영혼을 울리는 무엇이 있는 것이다.

 음독의 한 방법으로 윤독이 있다. 윤독이란 여러 사람이 돌아가며 낭독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교과서를 읽을 때 학생들이 돌아가며 읽는 것과 같다. 몇 해 전부터 해온 독서 모임에서도 윤독을 하기 시작했다. 한 주일에 한 번, 두 시간 정도 시간을 내서 책을 돌려 읽는데, 책에 따라 다르지만 두 시간에 대략 35장 남짓 읽는 편이다. 일주일에 한 번이지만 가랑비에 옷이 젖듯 시나브로 한 권의 책을 읽게 된다. 

 윤독을 하면 낭독의 장점을 모두 가져오면서 몇 가지 좋은 점이 더 있다. 우선 혼자 읽기 힘든 책을 읽을 수 있다. 특히 두꺼운 책일 경우는 그 부피에 압도되어 시작이 꺼려지고, 다소 어려운 책은 무슨 내용인지 모르니까 읽다가 도중에 그만두기 쉽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다. 누군가와 동행하면 서로 격려하고 이끌어주기 때문에 고단한 여정을 견디기 쉽다. 책 읽기도 마찬가지인데, 사실 독서는 재미도 있지만 힘든 일이기도 하다. 한 권의 책을 끝까지 읽으려면 집중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어울려 읽으면 일단 읽기 시작하게 되고, 나중에 그만두고 싶은 유혹을 훨씬 수월하게 이겨낼 수 있다. 그리고 윤독은 토론에 대한 부담을 줄일 수 있다. 보통 책을 읽은 뒤에 잠시 시간을 내어 책에 대한 궁금증이나 소감을 나누기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별로 표가 나지 않고 귀동냥으로 듣는 지식도 쏠쏠한 편이다. 무엇보다 윤독을 통해 상대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사람마다 얼굴과 말소리가 다르듯 낭독을 할 때도 그 사람만의 말의 표정이나 습관이 있다. 이러한 독특한 개성을 알게 되면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상대방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므로 집중력도 높일 수 있다. 

 코로나 때문에 대면 모임이 어려워 독서 모임도 비대면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보니 뜻이 같다면 장소에 상관없이 함께 책을 읽을 수 있다. 집에서 책을 펼치기만 하면 되므로 오가는 시간을 줄일 수 있고 장소 대여료나 커피값이 들지 않아 더욱 좋다. 코로나 시국이 끝나더라도 윤독의 경우는 계속 비대면으로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필요하면 번개 모임을 하면 되니까. 
 새해가 되면서 윤독에 남편을 끌어들였다. 퇴근 후에 컴퓨터로 바둑을 두거나 텔레비전을 보는 게 낙인 남편을 부추겨 일주일에 한 번 '사기열전'을 읽기 시작한 것. 몇 회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맹상군 열전'을 읽고 있다. 시작이 반이라니 마음으론 반에 반을 더하여 거의 다 읽은 것 같아 다음엔 무슨 책을 읽을까 즐겁게 궁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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