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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처럼 빼닮았지만 해안가 구릉 너머 떨어져 있는 울주군 서생면 송정항 방파제등대(사진 왼쪽)와 대송항 방파제등대. 김동균기자 justgo999@
쌍둥이처럼 빼닮았지만 해안가 구릉 너머 떨어져 있는 울주군 서생면 송정항 방파제등대(사진 왼쪽)와 대송항 방파제등대. 김동균기자 justgo999@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새털구름이 뭉텅이로 빠져든 바다 앞에서 길을 번갈아 본다. 항구가 보일 듯 말 듯 아슴아슴한 저곳으로 가보자. 간절곶관광회센터 앞 해안 산책로에 이정표가 있다. 갯골방파제까지 1㎞다. 웬걸, 산길이 나오고 경관등이 죽 늘어서 있다. 흙길을 걷다가 비탈진 나무데크 전망대에 내려섰다. 바위를 뚫고 자란 소나무 너머로 펼쳐지는 송정항. 바다로 길을 턴, 둥그런 호수 같다. 방파제에 몸을 대고 흔들리는 배들이 소형유람선으로 보인다. 한가운데에 자리한 시설물은 뭐지. "휴,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중년 남녀가 숨을 고르며 지나간다. 나도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며 숨찬 산책을 한다. 둥근 부표 하나와 슬리퍼 한 짝이 언덕배기를 꽉 붙들고 있다. 송림과 바다가 양쪽에서 팔짱을 낀 형세다. 솔잎과 자갈과 바람이 만들어내는 변주곡과 해안선의 레퍼토리가 걸음걸음 조화롭다.

3월 꽃바람 타고 펼쳐지는 마을과 항구
산자락을 따라 반쯤 걸었을까, '소머리밀회' 스토리텔링 표지판이 있다. 이 산에 관한 이야기다. '바다에 턱을 괴고 땅에 엎드린 산 모양이 소머리를 닮았다. 소머리끗이라 하며 배낭꼴, 사다리꼴, 수다뜰의 세 골짜기를 품었다. 은밀한 한 골짜기에 배낭을 풀어 던진다. 모자를 벗어 소나무에 걸어둔다. 자갈돌과 발을 비벼 내통한다. 그리하면 화조풍월을 아는 풍류객이며 세월의 목을 단번에 따는 낭만자객이다. 풍경을 보는 법이든 사람을 고르는 재간이든, 눈과 마음을 씻고 보면 사통오달이다.

눈앞에서 탁영대濯纓臺 - 굴원의 '어부사'에 나오는 노래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면 되지' 구절에서 따온 낱말. 물에 따라 처신하면 된다는 뜻으로, 세상이 깨끗할 때 정계에 나가고 더러울 땐 은둔한다는 말-를 만나게 되니 갓끈을 씻지 않을 수 없는 곳. 밀회는 덤이고 고백은 경품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곳은 풍류 가객의 길인가, 열정 연인의 길인가.

산책길이 끝난 곳에서 대형 굴삭기가 분주히 움직인다. 송정항도 올 2월에 '어촌뉴딜300 사업'에 선정됐다. 갈매기 떼가 요란하게 반긴다. 날개를 펼친 성대도 벽화담장을 날아오른다. 팔각정, 민박집과 횟집, 해녀의 집에는 이미 인적이 끊겼다. 대역병의 일상과 전쟁의 포화 속에, 흑해의 참담한 물결이 어디인들 밀려들지 않으랴. 해풍이 꾸덕꾸덕 미역을 말린다. 반원을 그리며 방파제 입구에 들어섰다. 어선협회사무실과 유료낚시터관리사무소, 원정 낚시꾼 숙소인 펜션들을 지난다. 정박한 어선 사이에 낚시를 드리운 아버지와 아이는 날개 달린 물고기도 만났으려나. 노란색 하트들이 빨강 등대의 하부에 아기자기하게 붙어 있다. 다가서니 내 키보다 높은 위치다. 등대를 돌며 빨강과 노랑의 조화를 본다. 19개의 나무하트 중에 5개가 날아가고 받침 철판이 찌그러져 있다. 끊임없는 해풍이 못 박힌 하트마저 날려 보냈나 보다. 

보통은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등대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하트가 흔들리는 순간마다 마음을 이렇게 분출해온 것인지. 등대의 가슴께에 있는 유리창 하트 사이로 햇살이 들락거린다. "이야, 얼굴 보기 힘드네요." 방파제 쪽에서 낚시꾼이 서로 인사를 한다. "다섯 시간을 서 있었구마는 다른 얼굴 구경도 신통찮구만요." "글치요. 어씨들도 코로나 걸렸나?" 그들이 말하는 얼굴이 물고기여서 나는 풉, 웃었다. 큰 물고기 통이 손끝에서 덜렁대는 걸 보니 조황도 신통찮은가 보다. 나는 계단을 올라 등대의 문을 슬쩍 닫았다. 송정항방파제등대, 그 이름표가 명료하다. 항로 우측 끝단 표지 등대로 구조물 높이 9.5m, 불빛 도달거리는 13㎞이다. 3월 바닷바람을 꽃바람인 듯 맞으며 몸체를 돌아본다. 온산공단과 유조선들, 소머리산과 드라마세트장, 마을과 항구가 널따란 꽃잎같이 펼쳐진다. 그들의 기운이 하트 송이로 빙글빙글 떠다닌다. 이곳으로 들어오는 밤길의 선박들은 가슴이 저려 어둠을 재촉할 것만 같다. 갈매기 떼가 난다. 갯바위에서 바람과 대치 중인 낚시꾼들의 코를 스치며.
 

몸체에 아기자기 붙은 노란색 하트 기운 주고받는곳 
아버지가 아이의 낚싯바늘에 미끼를 끼워주고 있다. 아이는 미끼만 먹고 달아나는 물고기가 얼마나 야속할까. 나는 항구 안의 시설물이 궁금해 낚시터 관리사무소의 창을 두드렸다. 캔커피를 든 중년의 지킴이가 빼꼼 얼굴을 내민다. "저기는 가두리낚시터라요. 그물을 쳐서 고기를 가둬 놓고 낚는 거지요. 자연산을 넣느냐고요? 아입니더. 남해안에서 양식 물고기를 가져옵니더. 그라고 낚시터 옆의 파란색 가두리에 넣어 한 달을 묵혀두어요. 그라믄 자연산이 되는 겁니더." 그는 이곳을 수년간 드나들다가 관리사무소 주인과 친구가 됐단다. 쉬는 날마다 낚시를 하고 사무소 일을 거들어준다고. 가두리낚시터에는 갖은 어종이 있다. 먼바다에 나가지 않아도 계절과 무관하게 다양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곳인 데다 낚싯대를 대여한다. 관광객이나 초보 낚시꾼도 손맛을 보기에 안성맞춤이다. 동해안에서 바다가두리낚시터를 만나긴 쉽지 않다.

개구리도 초목도 깨어나는 경칩이 지났다. 송정마을 어민들은 어떤 채비로 봄맞이에 나설까. 때마침 마을 사람을 마주쳤다. "지금은 미역철입니더. 방파제 너머에 수두룩이 떠 있는 부표 자리가 양식장이지요. 여기서 500m쯤 될 겁니더. 어부들이 새벽부터 작업해도 더는 못 나가요. 그 너머는 너울이 심해서요. 해녀들은 내항과 뒤쪽 갯바위에서 작업하지요. 얼마 전에는 전복을 따던 사람이 해경에 붙잡혀서 난리가 났어요. 벌금이 어마무시합니더. 몰래 따다가는 클납니더, 클나예." 해산물의 무단 포획과 채취 금지 경고문은 어느 항구에서든 볼 수 있다. 송정항은 조용한 게 아니었다. 내가 그들의 때를 모르고 왔을 뿐, 갈매기의 합창처럼 시끌벅적 바다로 들어가고 있었다. 횟집에도 민박집에도 사람들의 발길은 이어진다. 햇살 아래서 졸던 누렁 고양이가 방파제 쪽으로 내달린다. 씨알 굵은 학꽁치 냄새를 맡은 게 틀림없다.    

기계 소리를 밀어낸 물결 무대가 소머리산 입구에서 찰랑거린다. 자갈돌과 파도의 와글와글 소리가 북적인다. 부대끼는 솔잎들의 사각거림이 바다로 간다. 밀물 시간이다. 바다를 빠져나온 새털구름이 몸을 털고 있다. 이정표가 있는 자리에 다시 섰다. 전망용 망원경으로 그 속을 가늠해 보려 했으나 어둑한 그 깊이에 속만 울렁거릴 뿐. 그예 똑같은 하트를 지닌 대송항방파제등대로 몸을 돌린다. 드라마세트장을 지나려니 한 가족이 사진을 부탁한다. 닮은 입가를 담는 찰칵 몇 컷. 살랑바람이 지나다 온 가족의 눈웃음을 불러낸다. 
간절곶방파제에 들어섰다. 배 한 척이 조업을 끝내고 막 들어온 모양이다. 중형어선에서 두 어부가 물고기 통을 옮기고 있다. 트럭을 몰고 온 여성이 힘을 보탠다. 횟집 수족관으로 가는 물고기의 한때가 무척이나 심란하겠다. 간절곶대송항방파제는 요트 계류장으로 인기몰이를 할 뻔했던 곳. 파란 건물의 관광홍보관은 울주군 해양오염방제센터와 어업재해현장대응센터로 사용 중이다. 송정항등대와 똑같은 유리창 하트와 노란색 하트들이 대송항등대에도 환하다. 첫 등댓불도 2011년 8월 5일에 똑같이 밝혔다. 다른 점은 LED 유리 조명등을 바닥과 몸체에 설치한 프러포즈 등대라는 것.

산더미 처럼 쌓인 테트라포드 옆으로 애견과 산책을 즐기는 시민.
산더미처럼 쌓인 송정항의 테트라포드 옆으로 애견과 산책을 즐기는 시민.

가족·연인들 포토존으로 웃음꽃 가득한 곳
낮 동안은 오토바이 두 대의 말 없는 프러포즈! 나란히 등대 앞에서 마주 보고 있다. 어둠이 오면, 산책 나온 가족과 연인들의 웃음이 등대 불빛을 따라 밤바다로 흘러가리라. 남녀 한 쌍이 팔짱을 끼고 온다. 프러포즈 송과 축하 송을 은근 기대했건만, 서쪽을 배경으로 사진만 찍고 떠난다.

김려원 시인
김려원 시인

소확행의 반작용으로 나는 성큼성큼 여덟 계단을 오른다. 무한한 파랑이 반가운 간절곶등대, 널따란 간절곶공원, 그리고 그 너머로 영롱하게 퍼지는 저녁놀. 아무리 그럴싸한 프러포즈라 한들 저보다 화려할 수 있을까. "언젠가 나는 해지는 걸 마흔네 번이나 보았어."라고 말한 어린 왕자가 떠오른다. 어린 왕자의 별에서는 의자를 조금만 움직이면 지는 해를 맘껏 볼 수 있으니까. "슬퍼질 땐 해지는 모습이 보고 싶어져." "하루에 마흔네 번이나 해지는 걸 바라보다니 그때 너는 매우 슬펐던 모양이구나?" 어린 왕자가 아무 대답도 안 한 것처럼 놀도 말없이 산을 넘어간다. 똑같은 모습을 하고도 만나지 못하는 이 등대와 저 등대의 그리움을 파도와 바람이 실어오고 실어간다. 먼바다의 뱃사람도 대송리 어민도 지금쯤은 저녁상에 둘러앉았겠다. 조그만 항구에 찰박이는 어선들을 저녁놀이 발갛게 비춘다. 두 등대의 불빛도 빨갛게 켜질 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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