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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숙 수필가
강이숙 수필가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날이 있다. 마침 기차역이 아파트 단지와 멀지 않은 곳에 있어 마음만 먹으면 쉽게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이점이 있어서 좋다. 

시대와 문명의 속도에 맞춘 ktx가 아니라 도심을 벗어난 외곽 작은 역이다. 군청색 제복을 입은 역무원 두 세 명은 간간이 오고가는 승객들을 관리한다. 각종 일간지와 잡지가 꽂혀 있는 낡은 탁상용 책장과 나무 의자가 놓여 있는 대합실은 추억의 영화에 나오는 장면 그대로다. 

모처럼 맞이한 한가로운 주말을 이용해 혼자만의 길을 떠나기로 했다.

덕하역에서 아침 기차를 타고 고향 안동역에 도착하면 점심나절이다. 인근 관광지를 둘러보고 저녁에 돌아오는 일일 코스로 안성맞춤이다.

이른 시간이라 역사는 정적이 흐르고 플랫폼에는 나 혼자만 섰다.

일상의 주어진 삶의 무게는 때로는 가볍고 때로는 무겁기도 했다. 시시각각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현실은 어떤 미래를 꿈꿀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기도 했다.

차 창 밖은 평화롭다. 창틀 큰 화폭에는 계절의 생생한 풍경이 선물을 안겨 준다. 막 움트기 시작한 연한 싱그러움은 고흐가 그린 명화보다 더 명화 같은 창을 연출한다.

마음의 기적을 울리며 유년의 전설이 숨어 있는 날의 기억과 사색 속에서 들녘의 빛은 지난날을 소환해 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어떤 바람이 지금의 내 가슴에 스며들고  있는가? 

어느 날 느닷없이 들이 닥친 불청객 코로나는 온 세상을 혼돈 속으로 몰아넣으며 일상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국내외 여행길이 막혀 2년 동안은 아예 포기를 하고 살았다.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1년에 네댓 차례 여행을 다니던 내가 꼼짝 없이 발이 묶이니 참으로 난감했다. 대신 티비 프로그램 중 여행에 관한 거는 빠지지 않고 챙겨 보면서 그나마 아쉬움을 달랬다. 

'한국기행', '걸어서 세계 속으로', '세계테마기행', '트레킹 노트' 등, 관심을 가지고 보니 의외로 많았다. 그만큼 바쁜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여행은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중 '걸어서 세계속으로'는 매일 아침 6시 이른 시간, '세계테마기행'은 일요일 오후 5시 반부터 9시 반까지 무려 4시간을 하지만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는 놓치지 않았다. 아쉬움을 달래기에 이만한 횡재도 없는 것이다.

그런 시간들을 보내면서 혼자서 하는 국내 여행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나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기차여행이 가능한 것을 알고 쾌재를 불렀다. 마스크까지 쓰니 완벽한 혼자만의 세계라 더욱 좋았다. 

고교시절에는 완행열차인 비둘기호가 있었다. 아침 시간에 한 대가 가고 저녁 시간 맞추어 또 한 대가 반대방향으로 운행되어 우린 그걸 통학차라고 불렀다. 집에서 십여 리나 떨어져 있는 시골 간이역까지 새벽밥을 먹고 걸어가 지각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기차 시간은 에누리라는 게 없어 1분이라도 늦으면 놓치기 일쑤였다. 그걸 타고 가을이면 수학여행을 갔다. 그 당시 으레 대표 답사지가 경주 불국사와 토함산 일대였는데 우리 학교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새벽부터 어머니가 준비해 주신 삶은 달걀과 김밥, 톡 쏘는 음료수는 그 시절 단골메뉴였다. 덜컹거림과 수도 없이 울려 대는 기적은 우리에겐 그저 운치 있는 낭만의 사운드였다. 어두컴컴한 터널을 지나고 버스나 자가용이 다닐 수 없는 험준한 산길도 거리낌 없이 달렸다. 시가지 뒷골목의 이색적인 풍경은 외국여행을 하는 것 같은 착각이 빠져들게도 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차창을 스치며 흘러내리는 물방울들이 들뜬 가슴을 촉촉이 적셔주었다. 우리의 수학여행은 그야말로 역사와 문화, 자연이 어우러진 귀중한 체험의 장이었다. 

이토록 가슴 뭉클한 추억과 낭만을 안겨 주었던 비둘기호가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처럼 지금 타고 있는 이 무궁화도 새 문물에 밀려 사라질까봐 은근히 걱정스럽다. 옛것의 소중함을 점차 잃어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다. 그러기 전에 나는 부지런히 기차여행을 할 것이다. 

철저하게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나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앞만 보고 내달려온 인생에 쉼표 하나를 찍고 지나온 삶을 반추하며 그 속에서 깨달음을 구한다. 정신적인 휴식과 여유 속에서 가슴 울리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안동댐과 교교한 달빛을 품는다는 월영교를 한 바퀴 돌아 댐 기슭에 맛 집으로 유명한 매운탕 집에서 늦은 점심을 했다. 평생 고향을 지키며 살고 있는 언니와 오빠, 친구들이 있지만 혼밥을 고집했다. 그들에게 이 달콤한 행복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였다.

돌아오는 길은 잠을 청해 봐야지. 그래서 아련한 고향의 포근한 꿈에 젖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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