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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한 콘크리트로 만든 탄약고와 막사가 나무아래 몸을 숨기고 있는 외양포 포진지. 탄약고 사이엔 280㎜ 포좌가 원형으로 아직도 그 흔적을 유지하고 있다.
경고한 콘크리트로 만든 탄약고와 막사가 나무아래 몸을 숨기고 있는 외양포 포진지. 탄약고 사이엔 280㎜ 포좌가 원형으로 아직도 그 흔적을 유지하고 있다.

 

아픈 역사를 마주하는 발걸음은 무겁다. 가덕도 가는 길은 그래서 하늘도 낮게 내려앉아 온통 희뿌연 먼지로 가득했다. 울산에서 거제를 가는 길목에 위치한 가덕도는 부산의 끝자락에 앉은 섬이다. 부산이 품은 가장 큰 섬이지만 거제도와 연결하는 해저터널과 거가대교의 떠들썩함이 있기 전까지 조용한 은둔의 섬이었다. 가끔 신문방송에서 가덕도의 전통적인 숭어잡이인 '육수장망'을 소개하면서 알려지기도 했지만, 관심 없는 사람들에겐 작은 어촌마을 일뿐이었다. 그러나 한적해 보이는 이 섬이 겪은 시대의 부침은 참혹했고 강제노동의 고통과 삶터에서 쫓겨난 아픔의 시간을 품고 있다. 
 

가덕도
가덕도

# 지정학적 요인에 의한 역사적 부침
가덕도는 부산 강서구에 속한 섬으로, 낙동강이 만들어 낸 사구 두어 개를 거느리고 앉았다. 더덕이 많이 난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해안선 길이 36㎞에 작은 섬으로 통일신라 때는 당나라 무역항 중 하나였다. 조선 중기에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수군 주둔지로 해안 방어 기능을 담당했고 조선 말에는 쇄국정책의 척화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개방과 쇄국의 교두보였던 가덕도는 위로는 한반도로 이어지는 진해만을, 아래로는 일본 열도와 닿는 대한해협을 두고 있다. 이러한 지정학적 요인 때문에 가덕도는 190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침략과 수탈의 전면에 서게 된다. 1904년 러일전쟁을 빌미로 일본군은 진해만 요새 사령부를 설치한다. 
 
# 천혜의 요새처럼 숨은 외항포 포진지
가덕도 남서쪽에 자리한 외양포는 일본군 진해만 요새 사령부가 들어서면서 당시 마을 주민들을 강제로 내쫓고 포진지와 사령부 건물들을 지은 곳이다. 마을 전체를 병영으로 만들었다.

외양포로 들어가는 길목에 포진지가 숨어있다. 포구로 내려가는 내리막 경사지를 이용해 멀리까지 포의 화력이 미치도록 설계됐다. 외부에서는 언덕과 나무로 위장해 쉽게 제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입구에 '사령부발상지지'라는 건립비가 있다. 진지 안으로 들어가면 바깥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던, 작지 않은 규모의 공간이 나타난다. 오른쪽으로 높이 4~5m, 폭 10여 m 크기의 시멘트 건물 두 동이 웅장하다. 탄약고다. 두꺼운 콘크리트 벽을 치고 지붕에는 흙과 풀로 덮었다. 밖에서의 화염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이기 위해 ㄱ자로 꺾인 구조로 1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견고하다. 그 단단함은 차갑고 섬뜩하다.

탄약고 사이엔 280mm 포좌가 원형으로 그 흔적을 유지하고 있다. 모두 6문으로 구성돼 먼바다로 포신을 세웠던 그때의 가덕도는 삼엄했을 것이고 육수장망의 숭어잡이도 제약이 있었을 것이다.

왼쪽에는 당시 병사들의 막사로 사용하던 아치형 입구의 긴 구조물이 머리에 대나무를 이고서 자리하고 있다. 2개로 나누어진 내부 공간은 안으로 연결돼 그을린 흔적들이 역력하다. 그을린 벽에 다녀간 이들의 느낌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다. 이곳은 후일 한국전쟁 중 피란민들이 온돌을 놓아 잠시 거주하던 흔적이 남아 역사의 상처들이 중첩된다.
 

어민들을 강제로 내쫓고 병영으로 만든 외양포마을. 아직 그때의 흔적들이 곳곳에 아픔처럼 남아있다.
어민들을 강제로 내쫓고 병영으로 만든 외양포마을. 아직 그때의 흔적들이 곳곳에 아픔처럼 남아있다.

# 강제로 쫓겨난 외양포마을 
포진지를 나와 마을로 내려오면 곳곳에 일본식 목조주택들이 눈에 띈다. 사령부실과 헌병대, 병사들의 막사가 세워졌고 우물과 화장실, 수로 등을 팠다. 일본군이 물러나고 주민들이 들어가 살기 시작하면서 거주공간의 부족으로 한 건물에 여러 가구들이 살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보수공사를 통해 벽을 세우고 실내를 개조하면서 가구마다 지붕 색깔을 달리해 한 지붕 아래 몇 가족이 사는지 시그널처럼 남았다.  마을 뒷산 국수봉에는 화약고, 관측소, 산악보루 등이 아직 그때의 흔적을 간직한 채 먼바다를 보고 앉아 있다.  

대항항 포진지 동굴로 가는 나무덱이 해안을 따라 길게 이어진다.
대항항 포진지 동굴로 가는 나무덱이 해안을 따라 길게 이어진다.

# 절벽따라 동굴 뚫고 야포 배치한 대항항 포진지
대항항 포진지 동굴은 1944년 말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175m 길이로 두 군데 입구를 만들고 야포를 배치한 곳이다. 대항항을 내려가 우측으로 돌아서면 해안가를 따라 길게 나무덱이 나타난다. 바다를 옆에 끼고 얼마 가지 않아 절벽에 돌출된 거대한 포신의 모형이 나타난다. 첫 번째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포 모형 아래에는 당시 일본군의 모형과 그때의 상황들이 안내돼 있다. 동굴 안에는 당시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의 노역 현장을 모형으로 전시해놨다. 무자비한 총칼 앞에서 굴복해야 했던 힘없던 민초들의 삶이 처참하게 드러난다. 
 

대항항 포진지 동굴에 모형으로 만든 야포가 포신을 내밀고 있다.
대항항 포진지 동굴에 모형으로 만든 야포가 포신을 내밀고 있다.

동굴을 따라 걷다 보면 당시 일본군들이 만든 다른 포진지에 대한 설명도 볼 수 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결사항전했던 것처럼 한반도 남단에 많은 진지를 구축했고, 지금도 여러 곳에서 그 흔적들이 남아있다. 

동굴 속 조명을 따라 걷다 보면 환한 빛이 확산된 두 번째 입구가 나타난다. 물고기 머리 모양의 조형물을 붙였다. 동굴 끝에는 작은 동굴이 두 군데 더 있고 일몰동굴과 소원의 벽으로 꾸몄다.
 

대항항 포진지 동굴 입구 참혹한 역사의 현장에도 따뜻한 봄 햇살이 낮게 내려앉았다.
대항항 포진지 동굴 입구 참혹한 역사의 현장에도 따뜻한 봄 햇살이 낮게 내려앉았다.

#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
동굴에서 바라본 바다는 잔잔하기 그지없다. 봄 햇살을 머금은 물결이 반짝이고 해안으로 찰싹거리는 파도는 평화롭다. 편안함의 이면에는 늘 아픔이 깔려 있다. 모든 일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게 진리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오늘의 평화를 만들어 냈다. 가덕도 일본군 포진지는 그래서 조선인 징용자들의 땀으로 만들어진 아픔의 현장이다. 알록달록한 조명과 조형물로 관광자원화했지만, 슬픔의 공간이고 분노의 시간이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외양포 포진지 탄약고 안 영상의 마지막 글귀는 그래서 많은 것을 시사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

포진지 동굴을 돌아 나오는 발걸음이 무겁다. 하늘이 잔뜩 내려앉았다. 비가 뿌렸다.  글·사진=김정규기자 kjk@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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