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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길 수필가  

멀리 바라보이는 산봉우리가 우뚝하다. 때맞춰 멧부리에 앉았던 삿갓구름이 간들바람에 업혀 흘러간다. 흐르는 구름 아래로 능선이 병풍처럼 펼쳐졌고 가파른 골짜기에는 연둣빛이 드문드문 무늬를 이루어 기어오른다.
 
햇살이 잔잔한 오후, 귀에 익은 노래를 들으며 마루에 앉아 목련 꽃차 한 잔 우려낸다. 접힌 꽃잎이 유리잔 속에서 몽실하게 피어난다. 마른 꽃잎 같은 내 마음도 찻잔 안으로 스며든다. 
 
잔디에 앉았던 길고양이가 차향에 빠진 나의 외면이 서운한지 짧은 그림자를 거두어 달아난다. 
 
앞마당을 말끄러미 내다본다. 잔디의 푸름이 더 짙은데 불두화 그늘에 앉은 금초롱마저 불을 켠 듯 붉은 등을 줄줄이 매달았다. 엉겅퀴 대궁도 머지않아 보랏빛 꽃을 피우려는지 사슴 목처럼 길어졌다. 한자리에 있는 것이 달리 보이자 눈에 들어오는 풍경 너머 짙은 그리움의 마루가 놓인다.
 
유년의 마루도 앞산이 환히 보이고 종일 볕이 내려앉았다. 마루는 안방과 작은 방을 잇고 있어 두툼한 나뭇결에 우리 집 이야기가 고스란히 배어있을 것 같았다. 
 
옻칠로 사철 붉은빛을 머금고 반질거렸으며 군데군데 움푹 파인 나이테는 할머니 주름보다 깊었다. 그리 세월의 풍파를 잘 견뎠기에 텃세를 부려도 괜찮았을 테지만 작은 삐걱거림조차 없었다. 
 
동이 트면 하루가 마루에서 시작되었다. 할머니는 식전 곰방대를 드리웠으며 두레상도 마루에 펼쳤다. 
 
어머니는 아침마다 막내딸의 긴 머리를 모양내어 땋았고 자식이 밥을 먹는 동안 마루 끝에 서서 오빠의 교복도 다렸다. 감자나 고구마며 옥수수도 삶아 내고 어둑하게 비를 물고 있는 날이면 모여 앉아 다슬기도 깠다. 길쌈과 다듬이질을 하며 눈물과 웃음마저 나눴다.
 
재미있는 추억도 있다. 네댓 살쯤으로 기억되는데 해넘이께 식구들이 마루에서 사카린을 섞은 술지게미를 먹었다. 어머니가 마지못해 숟가락에 묻힌 단맛을 내 입으로 넣어줬다. 그 맛에 홀려 목 넘김 하느라 낯빛이 하루가 내려앉은 저녁하늘처럼 물들었다. 낯선 그림에 모두 깔깔거리자 내가 왜 일어섰는지 건들건들하던 몸이 사정없이 마당으로 꼬꾸라졌다.
 
배꼽 잡을 일 뒤에는 가슴 아린 일도 있다. 하루는 막내 삼촌이 만만하게 기대던 내 어머니에게 갖은 성질을 부렸다. 일그러진 청춘 탓도 큰형 앞에 고개 들지 못하는 설움도 거침없이 쏟아냈다. 철부지 투정쯤으로 여긴 어머니가 흔들림이 없자 그게 더 분했는지 마루에 발길질을 해댔다. 그것도 모자라 마루 끝을 뽑겠다며 씩씩거렸다. 한쪽 귀퉁이에 앉은 어머니가 이 빠진 뚝배기처럼 내동댕이쳐질 것 같았으나 거센 청춘의 울분에도 마루는 끄떡하질 않았다. 
 
마루는 이웃의 쉼터였다. 누구라도 대문에 들어서면 엉덩이를 먼저 걸쳤다. 밭일을 끝내고 집으로 들어가다가도 아랫도리를 툭툭 털고 앉았다. 해거름에 장화 밑창으로 진흙을 물고 와서 바지 아랫단에 붙여온 가막살이만 두고 갈 때도 있었다. 
 
손님이 오면 막걸리 상을 차리고 가끔 방물장수가 걸터앉아 여기저기 모아온 이야기보따리도 풀었다.     
 
도시를 떠나 마루가 있는 집을 지었다. 발코니 창으로 기웃대던 야윈 햇살에 목말랐는데 이제 종일 쏟아지는 시골 볕을 마다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여태 가진 빈곤함마저 잊게 한다. 
 
내 근황이 궁금할 사람이야 있겠냐만 누구의 안부가 궁금해지면 바람에 묻고 별에 전하는 재미도 마루가 있어 쏠쏠하다. 
 
기다림처럼 놓인 마루는 앞마당을 보고 있어 '누구나 언제든 오세요!'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제로 우리 집에 오는 사람들도 나의 부재를 확인하느라 현관 벨부터 누르지 않는다. 대개 마루에 궁둥이부터 붙여 실내를 살핀다. 택배가 와도 그렇지만 이웃에 건넨 접시도 내가 없으면 마루에 놓인다. 
 
집을 받쳐주는 것도 마루이다. 밖에서 안을 보거나 안에서 바깥을 내다보면 아래 배경이 된다. 마당에 자투리 꽃밭도 마루로 인해 눈이 더 간다. 길을 오가는 사람들 시선도 그러하다. 어쩌다 성큼 마당에 올라서는 사람은 마루가 집을 안아준다고도 한다. 
 
마루는 손을 내민 듯 가만히 앉아 안과 밖을 이어준다. 흙 묻은 맨발이면 어떤가. 참새 방앗간처럼 들어와 새가 물어가도 괜찮을 말만 나누어 세상눈도 상관없다. 물 한 잔도 좋고 차 한 잔도 좋을 테다. 
 
나 역시 말끔하지 못한 거실이 신경 쓰이지 않고 푸성귀라도 차릴 밥상 걱정하지 않아도 돼 마루가 고마울 따름이다. 
 
안과 밖의 사이에 놓인 마루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완충지대이다. 현대는 정서적 기능보다 기능적인 공간을 더 선호한다는데 그건 공간에 마음이 지배당해서가 아닐까. 요즘 안방보다 탁 트인 마루가 안온하게 느껴진다. 그러고 보면 닫힌 공간보다 열린 공간이 좋아지는 나이 탓인 것 같다. 
 
마음과 마음을 시시때때로 나누면 사이가 더 정겨워지듯이 사람의 마음에 이런 마루가 있다면 선뜻 몇 평 내어놓아도 좋을 성싶다. 
 
마루는 여전히 햇살바라기다. 찾아줄 사람이 있건 없건 품을 데운다. 세상 이야기인 듯 블루투스에서 흘러나온 이방인의 애절한 로망스가 나뭇결 사이로 내려앉는다. 꽃가루 향과 함께 물오른 나무들을 건너온 바람마저 달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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