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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순 수필가
배정순 수필가

전남 광양, 망덕포구에 자리한 '윤동주 시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을 다녀왔다. 지인을 따라나섰던 건 민족시인 윤동주를 있게 한 정병욱의 본가라 하기에 관심이 쏠려서다. 이 세상에 윤동주 시詩를 알린 사람, 그런 인물이라면 입소문이라도 났을 법한데 내 귀가 어두웠던 걸까. 어디에서도 윤동주 시에 얽힌 내력을 들어본 적이 없다.

정병욱 가옥이 문화재로 등록된 것은 2007년도라고 한다. 중요한 역사의 한 토막이 반세기가 넘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게 의아했다. 한국인이라면 윤동주의 시 한 소절쯤은 알고 있을 법한데 그 시에 생명을 불어넣은 당사자의 이름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니…. 

윤동주와 정병욱은 일제 강점기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면서 선후배 사이로 만났다. 정병욱이 학보사에 기고한 산문이 마음에 들어 선배인 윤동주가 먼저 찾아가 절친한 친구로 발전했다. 하숙집 한 방에서 형제적 우의를 다지며 어려운 시절을 견뎠다. 그때는 조선 청년이 자기 뜻을 소신껏 펼칠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윤동주는 집필한 글을 출간하고 싶었지만, 일본이 우리의 민족혼을 말살하려 창씨개명을 강요하던 때였다. 작품이 한글로 되어 있어 시집을 간행한다는 건 섶을 지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격이었다. 하여 일본 유학길에 간추린 시 19편을 셋으로 나누어 한 부는 자신이, 한 부는 학부 교수님께, 한 부는 친구 정병욱에게 보관을 부탁했다. 

태평양 전쟁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일본은 조선 청년들을 전선으로 내몰았고, 정병욱도 예외는 아니었다. 징병에 끌려가기 전 그는 윤동주의 시를 몸에 지니고 섬진강 하류 망덕포구에서 양조장을 하는 어머니를 찾았다. 친구의 시편을 보관하기엔 어머님께 맡기는 게 가장 안전할 것 같아서였다. 잘 보관해 달라는 당부와 함께 따로 부탁한 말이 있었다. "혹여 동주나 내가 죽고 돌아오지 않더라도 광복이 되거든 이 시를 연희전문학교에 보내어 세상에 알리도록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유언과도 같은 아들의 말을 그의 어머니는 군말 없이 받아들여 19편의 시를 가슴에 품었다. 들키면 아들뿐만 아니라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건 자명 한 일이었다. 한데도 어머니는 조금의 망설임 없이 아들의 부탁을 신실히 수행했다. 은밀하게 마룻장을 뜯어내고 땅을 파 짚을 깐 다음 빈 술독을 들여놓았다. 훼손을 우려해 원고를 명주 보자기에 싸 독 속에 고이 보관했다.

애석하게도 윤동주는 1945년 광복 반달 전 교도소에서 옥사하고, 정병욱은 징병에서 돌아왔다. 나누어 보관했던 동주의 시 세 부 중 두 부는 소실되었고. 자신에게 맡겼던 한 부만 남아있었다. 정병욱은 연희전문 동기 강처중과 함께 자신이 가지고 있던 19편에 남아있던 시를 추려 31편을 194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을 발간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윤동주의 시비를 건립하는가 하면 기념사업에도 물심양면으로 친구 윤동주의 시를 알리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대다수 사람은 윤동주의 '서시, 별을 헤는 밤' 정도는 알고 있지만, 세상에서 묻힐 뻔한 그 시에 날개를 달아준 인물이 정병욱이라는 건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2012년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윤동주 문학관을 세워졌지만, 시에 생명을 불어넣어 준 정병욱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문득 성경 속 세례자 요한이라는 인물이 떠오른다. 요한은 광야에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던 인물로, 그 당시 예수보다 훨씬 유명 인사로 알려졌었다고 한다. 군중들은 저분이 오시기로 한 메시아가 아닐까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는 단호히 말했다.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조차 풀어 드릴 자격이 없다"라고. 낮아지고 낮아져 예수님 사랑을 꽃피운 인물이지만, 그때 말고는 성경 속 어디에도 그 사람에 대한 언급이 없다. 세례자 요한이 명예욕에 앞서 자신이 메시아라고 나섰다면 어찌 되었을까. 정병욱이 목숨을 걸고 시를 보존하지 않았다면 윤동주 사가 빛을 볼 수 있었을까.

다행히 정병욱 가옥이 뒤늦게 기지개를 켜고 있다. 학계에서도 심포지엄을 여는가 하면 윤동주와 정병욱의 우정, 두 분의 순결한 민족의식과 시 정신을 고취하는 학술 발표도 이어지고 있다. 정병욱 가옥이 문화재라고는 하지만 입간판이 붙어있어 알아볼 정도지, 귀한 가치에 비해 초라했다. 윤동주 시의 산실이라는 의미보다 그 안에 담긴 고귀한 우정의 무게가 가슴에 묵직하게 와닿았다. 

발길 닿는 이 없이 사라질 뻔한 저항시인 윤동주의 발자취가 친구 정병욱 덕에 살아나 낯선 사람의 발길을 끌어모으고 있다. 만약 두 사람 사이에 한방에서 뒹굴던 우정이 없었다면 윤동주의 시가 빛을 볼 수 있었을까. 새삼스레 내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나에게 그 비슷한 우정이라도 있는지….

정병욱이 말년에 남긴 말 한마디가 회자하고 있다. "내가 평생 해낸 일 가운데 가장 보람 있고 자랑스러운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윤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린 일"이라고. 친구를 위한 자기 삶에 한 치 후회가 없다는 말일 터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윤동주의 양심선언과도 같은 별을 헤는 밤의 시詩 구절이 두 청년이 살아낸 삶이었기에 가슴에 감동으로 꽂힌다. 그런 신실함으로 보기 드문 우정을 키워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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