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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때 명랑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신흥사. 평소에는 내면을 닦고 국난엔 의연히 일어나 위기를 극복했던 호국도량으로 천년의 시간을 이어오고 있다. 김정규기자 kjk@ulsanpress.net

부처님이 오신 날로 전국의 절집이 야단법석이었다.
 기원전 246년이 부처의 탄생으로 알려졌으니 벌써 2,000년도 훨씬 전의 일이다.
 길어야 100년을 못 사는 인간이 가늠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그러나 시간의 연속성 위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기록으로 남아 그 오래된 시간을 기억하고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명맥을 유지한 그 흔적들은 역사가 되고 문화재가 된다. 
 세월의 풍상 앞에 가람은 남루해졌지만 고색이 창연해졌고, 규모는 작아졌지만 진귀한 보물을 품은 천년고찰 호국도량 신흥사를 찾아간다.
 

석조여래좌상
포항 오천의 불석을 배로 옮겨와 
조각승 영색이 17세기에 제작
재료산지·운반경로 처음으로 밝혀져

응진전
원래 대웅전으로 사용하다 
건물 전체를 1년여에 걸쳐 옮겨
내부 건축양식·단청 예술 가치 높아

 

신흥사 입구에 자리잡은 회화나무. 예로부터 복과 재물 등의 의미를 지녀 장원급제자에 하사한 어사화로 사용되기도 했다. 김정규기자 kjk@ulsanpress.net

# 400여 년의 시간을 건너온 회화나무
부처님 오신 날을 지낸 산사로 가는 길은 호젓하다. 
 북구 함월산을 거슬러 오른다. 절집으로 가는 도로는 좁고 길다. 속세의 때를 벗으라는 듯 온 산 초록의 향연이 눈부시다. 
 강동에서 4차선 도로를 버리고 태연재활원 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신명천을 따라 10여 분 가다 보면 우측 경사지에 우뚝 선 신흥사가 나타난다.
 절집은 경사면에 크게 두 개의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앉은 형상이다.
 아래 계단을 오르다 보면 우뚝 선 회화나무를 만난다. 400여 년의 시간을 건너온 나무는 이제 노쇠해 절반이 인공 보호물로 채워져 힘겨운 모습이지만, 깡마른 가지로 물을 올려 연초록 잎들을 앙증맞게 피웠다. 살아있나 싶을 정도로 기둥의 퇴색함은 가지 끝으로 가면서 점차 살아나 생명의 신비함을 일깨워준다. 
 회화나무는 예로부터 복과 재물, 지식을 가져다준다는 의미를 지녔다. 조선시대에는 장원급제자에게 임금이 하사하는 어사화로 사용되기도 했다. 
 

# 신라 때 명랑조사가 창건
신흥사는 조계종 통도사 말사로 창건 연도가 635년(선덕여왕 4)년과 673년(신라 문무왕 13)으로 명확하지 않다. 다만 문두루비법으로 신라를 당나라에서 구한 명랑조사에 의해 창건됐다는 것만은 선명하다. 창건 당시엔 건흥사(建興寺)라 불렸다. 
 명랑은 문무왕 11년(671)에 경주 낭산에 밀단을 마련하고 문두루비법 법회를 열어, 특문두루진언(만트라·Mantra)과 밀교의 의궤로 신라 침공을 위해 서해를 건너오던 당나라 병선을 침몰시켰다 전해진다.(삼국유사 권5) 
 불교와 밀교의 융합으로 나라를 구한 도력의 법회는 융성해졌고 전국에 추앙하는 절집이 생겨났다. 호국을 근간으로 안으로는 참선과 정진으로 내면을 갈고닦고 위기 때는 의연히 세상 밖으로 나와 국난을 극복하는 데 앞장섰다.
 문무왕 때 만리성을 쌓는 동안 승병 100여 명이 머물면서 무술을 연마하며 성을 쌓았다고 전해지는걸 보면 창건 당시부터 상당한 규모의 호국도량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 호국도량의 역사 이어져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제대로 된 전쟁 한번 못해보고 부산에 이어 울산마저 순식간에 무너졌다. 분개한 울산의 백성들이 기박산성(旗朴山城)에 집결했다. 경주까지 소문이 퍼져 1,000여 명이 모여들었다.
 당시 신흥사 주지 지운(智雲)이 이끄는 승병 100여 명도 군량 300석을 메고 지고 합류했다.
 이들은 울산 근교 요새마다 진을 치고 왜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등 혁혁한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눈엣가시 같았던 승병들의 본거지임을 간파한 왜적들에 의해 절은 소실됐고 찬란했던 불적들은 사라졌다. 
 인조 24년(1646) 경상좌병마사 이급이 다시 절을 세워 신흥사라고 개칭했다. 
 이후 고종 8년(1871) 경상좌병마사 윤선응이 신흥사에 진을 설치하고 보루를 쌓아 신흥별장(新興別將)을 두었다는 기록과 더불어 1872년에 제작된 신흥산성도(新興山城圖)에도 나와 있는 것을 보면 신흥사 호국도량의 역할은 오랫동안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에서 삼성각으로 오르는길. 삼성각 앞에서면 신흥사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대웅전에서 삼성각으로 오르는길. 삼성각 앞에서면 신흥사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김정규기자 kjk@ulsanpress.net

# 승병들의 지휘소였던 신성루
계단을 올라서면 2층 누각으로 이루어진 신성루가 웅장하다. 절집으로 들어가는 산문인 셈이다. 입구 양쪽엔 사천왕상이 벽화로 조성돼 있다. 신성루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의 지휘소로 활용됐다. 
정면에 함월산 신흥사, 뒤편엔 신성루 현판이 붙어있다. 신성루 맞은편엔 40여 년 전 중창 불사한 대웅전이 자리하고 있다. 
 

재료 산지와 제작 과정 등이 눈 밝은 스님에 의해 발견돼 지난해 보물로 지정된 신흥사 대웅전 석조여래좌상. <br>
재료 산지와 제작 과정 등이 눈 밝은 스님에 의해 발견돼 지난해 보물로 지정된 신흥사 대웅전 석조여래좌상. 김정규기자 kjk@ulsanpress.net 

# 포항 영석으로 조성된 아미타여래좌상
대웅전에는 석조아미타여래좌상과 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석조아미타여래좌상은 17세기 조각승 영색이 포항산 불석(拂石·규산염의 일종으로 흰색의 광물)을 사용해 만든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현재 응진전으로 사용하고 있는 옛 대웅전 건물을 옆으로 옮기고 불사를 진행할 때 어느 눈 밝은 스님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복장유물을 통해서 처음으로 알려졌다. 
 발원문에 따르면 1649년 불석 산지였던 포항 오천에서 돌을 채석해 배를 이용해 신흥사까지 옮겨온 사실이 확인됐다. 당시 불석 불상의 제작지와 운반 경로를 구체적으로 밝힌 첫 번째 사례로 재료의 산지와 이운 과정을 알 수 있어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커 2021년 12월 보물로 지정됐다.
 

대웅전 중창불사때 유압 잭과 레일을 이용해 1년여에 걸쳐 전체를 들어 옮긴 옛 대웅전인 응진전. 김정규기자 kjk@ulsanpress.net

# 단청의 백미 응진전
1988년 대웅전을 새로 지으면서 원래의 대웅전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수많은 유압 잭을 건물 하부에 설치하고 레일을 이용해 건물 전체를 들어 올려 하루에 몇 ㎝씩 1년여에 걸쳐 이동시킨 특이한 공법을 사용했다. 이렇게 수고로움으로 옮겨진 대웅전은 응진전이라는 새 이름을 달았다. 
 응진전은 팔작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다. 기둥 위에 올린 2익공(翼工, 기둥머리에 붙어 보를 받치고 있는 장식으로, 새 날개 모양을 하고 있다)에는 연꽃이 조각돼 있는 등 건물 전반에 걸쳐 조선 후기 사찰 건축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대들보의 머리초는 문양 요소의 독창적인 구성으로 조선 후기 단청 양식의 중요한 연구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어간 중앙 반자에 채화된 용 그림은 뛰어난 농필의 경지를 보여주는 채색화로서 예술적 가치를 보여주며 당시 통도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당대 최고 화사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궁궐의 양식을 보여주는 응진전 건축 양식. 단청의 화려함이 당대 최고의 화사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br>
조선시대 궁궐의 양식을 보여주는 응진전 건축 양식. 단청의 화려함이 당대 최고의 화사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정규기자 kjk@ulsanpress.net

# 새로운 변화를 실천하는
응진전을 뒤로하고 삼성각에 오른다. 작지만 호국을 실천하고 보물을 간직한 가람이 한 눈에 들어온다. 
 최근에 창고로 사용하던 신성루를 깨끗이 정리하고, 서각 전시를 열기도 했다. 앞으로 작은 공연, 전시 등을 계획하고 있다. 신성루 옆으로 템플스테이를 위한 건물 마무리가 한창이다. 
 절집으로 오르던 길을 따라 계속 오르면 울산 북구 매곡동과 경주 양남면을 잇는 갈림길에 선다.
 길 한편에 '기령'이라 새겨진 큰 바윗돌이 서 있다. '기박이재'의 한자 표기로 여기서 기박산성이 지척이다. 목숨을 걸고 나라를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이곳에서 해마다 4월이면 의병추모제를 열어 넋을 위로한다.  글·사진=김정규기자 kjk@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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