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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 요양원 

이영필
 
흰 억새 머리칼을 쓸어 넘긴 바람 손이
숨차 오른 고갯마루 옷고름 휘날린다
한 때는 들꽃 향기에 
취해 살던 날인데

창 없는 창밖에서 햇살을 만지다가
낯선 이 마주하고 꺾인 허리 다독일 때
명치끝 불빛을 쏘며
달려가는 구급차

고려 땐 지게에다 부모 지고 산에 갔고
지금은 승용차로 요양원 모셔간다
그나마 언덕 삶인 난
해도 보고 달도 보는

모두가 다짐한다 안 아프고 살아가길
눈물도 말라붙은 저문 해 수발 앞에
한 생을 유모차에다 느릿느릿 미는 가을
 
△ 이영필 시조시인: 1995년 '경남신문' 신춘문예시조 당선, 시조집'목재소 부근''장생포 그곳에 가면''금빛 멜로디''반구대 가는 길'외 다수. 울산문학상, 울산시조문학상, 성파시조문학상, 김상옥백자예술상.
 

서금자 시인
서금자 시인

늙음은 생명체가 짊어지는 숙명이다. 건너 뛸 수 없는 선이다. 이영필 시조시인은 '억새 요양원'을 제목으로 비켜 갈 수 없는 늙음을 잔잔히 그려내고 있다.


 교육계에 함께 하다 퇴임한 여성들로만 구성된 매월 모임을 며칠 전 가졌다. 그날 실버타운을 알아보고 왔다는 한 회원의 이야기가 화제로 떠올랐다. 먼 훗날 일로만 여겼던 이 용어를 접하고 한동안 낯설어했지만 모두 한 번씩은 생각해 왔다는 걸 입증이라도 하듯 서먹한 분위기가 잠깐 감돌았다. 그리고는 그 회원이 다녀온 실버타운의 정황을 묻고 답하는 시간이 꽤나 길었다. 


 실버타운을 알아보고 온 회원은 부부가 농장을 마련해 별장으로 살면서 참 행복하게 살고있는 분이어서 나에겐 큰 충격이었다. 그녀는 아직 힘이 있을 때 그곳에서 의식주 일상에 신경쓰지 않고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는 없었다. 늙음은 피해 갈 수  없는 일. 영원은 없다는 말, 시어처럼 들리던 그 말이 현실로 자리하는 순간이었다. 
 그녀에게 다음 달에 올 때는 실버타운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아보고 오라는 과제를 주고 그날 모임을 마쳤다. 돌아오는 발걸음에 자꾸 무언가가 차이는 기분이었다. '영원은 없다'는 그 말을 세뇌시키는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시의 시구처럼 '한 때는 들꽃 향기에/취해 살던 날인데'를 되뇌어 보지만 허허로움은 지울 수가 없었다. 


 시인은 '고려 땐 지게에다 부모 지고 산에 갔고/지금은 승용차로 요양원 모셔간다'고 쓰며 짐짓 나 같은 독자들을 깨우고 있다. 사랑은 한 시절의 불꽃으로 타오르고 끝남을 말해 주는 듯, 헐떡이며 그 무엇을 갈망하며 걸어온 날들이 산 능선 저 만치에 걸려 있는 듯 공허하다. 
 시인은 또 3연 마지막 행에 절창 한 소절을 내 보인다.'한 생을 유모차에다 느릿느릿 미는 가을' 그렇다. 피 할 수 없는 이 과제, 우리는 그 가을 길을 향해 가고 있지 않은가. 이 시구는 나를 한참 숙연케 한다. 어제를 돌아보고 오늘에 감사하며 내일을 조용히 맞을 준비를 하라고, '실버타운'의 말이 낯설지 않도록 타이르고 있다.


 그래 그 유모차에 건강한 사랑의 추억을 싣고 갈 수 있다면. 유비무한을 향한 아름다운 과제일지도 모른다. 남은 이들에게 선물로 기억되게 하는 숭고한 과제일지도 모를 일이다. 서금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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