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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逆)방향으로 더 깊이

이자영

시간이 촉박해 역방향 KTX를 탄 건참 잘한 짓이다

이제부터 나는 점점 목적지와 멀어질 것이다 
길이 아닌 곳을 배포좋게 갈 것이다
어질어질 멀미 같은 설렘으로 
거꾸로 거꾸로 거슬러가면 
철로변 어디쯤에서 내 지난날을 증언하는 
중년의 침목(枕木)하나 만날 것이다 
녹슨 바람의 허리를 떠받치며 
서럽도록 애틋한 개망초의 생애를 주절거릴 것이다 

세월 곳곳 들를 곳 많은 나의 기차는
수없는 정차를 되풀이하다가 
더욱 더 아득히 아득히 
도착지 없는 출발을 향해 속력을 낸다

△이자영 시인: 1984년 제34회 개천예술제 문학신인상 당선. 울산MBC공모 신인문예상, 부산MBC공모 신인문예상, 녹색시인상, 박재삼문학상, 한국글사랑문학상, 울산문협 올해의작품상, 울산시인상, 울산문학상, 울산펜문학상 등 수상. 시집 '하늘을 적시고 가는 노을 같은 너는''밤새 빚은 그리움으로''單文이 그리운 날>''이별 없는 시대''꿰미''꽃다발 아니고 다발꽃''고요한 수평'.
 

김감우 시인
김감우 시인

쉼보르스카의 시 '여행 전날 밤'이 생각나는 여름밤이다. "모든 것으로 가득 차 있지만 동시에 비어 있다고?" "모든 한계를 뛰어 넘어 드넓게 확장되어 있다고?" 라고 말한. 


 오늘은 역방향 기차를 타고 이자영 시인이 떠나려는 여정을 따라가 본다. "길이 아닌 곳으로 배포 좋게 갈 것이다" 이 시가 나를 잡아당긴 지점은 바로 여기다. 유혹하는 힘이 강하다. 그런데 왜 이리 쓸쓸한가. 호기롭게 무언가를 버리는 모습인데 그 매력에 자유롭게 동참하고 싶은 것인데. 이 아리게 텅 빈 듯한 고독감은 어디서 오는가. 깊어진다는 말은 외롭다는 말과 동의어인가 보다.

 길이었다고 믿고 달렸던 것들의 허상을 몇 차례 경험하고 나니 목청껏 핏대를 올리던 <목표>들이 별 의미 없이 흩어진다. "형식은 생에 대한 또 다른 배반이다"라는 말처럼. 
 역방향으로 간다는 것은 비단 왔던 길을 거꾸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길을 거슬러 올라가며 깊어지는 일, 정처가 없어 늘 머무는 곳이 목적지이고 형식을 풀어놓았으니 얼마나 가벼운가. 본질과 가치는 항상 가볍게 지나쳐 버린 풍경 속에 있었는지 모른다. 


 KTX를 타면서 역방향으로 앉으면 예상치 못한 다른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빠르게 다가와서 휙 지나가 버리는 바깥의 풍경들이 조금씩 물러나는 내 품속에 뛰어 들어와 안긴다. 바짝바짝 앞으로만 다가가던 내 몸이 뒤로 물러나면서 잃어 가던 것들과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이 광경을 "나는 이제부터 목적지와 멀어질 것이다"라고 표현한다. 이제부터 시인의 목적지는 철로 어딘가에 침목으로 누운 스스로의 지난날이고 녹슨 바람의 허리이며 서럽도록 애틋한 개망초의 생애이다.


 봄 지나고 초록이 짙어질 이즈음이면 나는 계절의 속도계에 몸을 맡겨버린다. 잔손금처럼 수천 갈래로 갈라지던 불면의 봄밤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어서다. 길과 길이 아닌 것들 사이로 쏟아지던 끝없는 질문의 시간을 초록으로 덮어두고 싶어서다.  김감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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