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바위 음각으로 수천년을 건너온 섬세한 결
절벽바위 음각으로 수천년을 건너온 섬세한 결
  • 김려원
  • 2022.07.24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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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 김려원 시인의 시를 품은 울산 12경] 1. 대곡천의 암각화
1. 7천년 설치예술에서 새겨듣는 대곡천 시어들

반구대 암각화는 그 내용이 무엇이든 신석기시대의 시 혹은 시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기록된 최초의 시입니다. 우리는 그 내용을 알 수 없지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반구대 암각화는 우리에게 시의 첫 마음을 돌아보게 합니다.  '반구대 암각화' 책머리에서 (백무산·임윤·맹문재 엮음, 푸른사상)
 

반구대 암각화 일대를 휘어 감으며 흐르는 대곡천. 김동균기자 justgo999@
반구대 암각화 일대를 휘어 감으며 흐르는 대곡천. 김동균기자 justgo999@

체감 기온 35도. 땡볕의 기세에 현관문 앞을 서너 번 돌이켰다. 해가 서쪽 산을 탐하면 출정이 곤란한 시간. 어서 '챙 넓은 모자와 손선풍기와 냉커피를 챙긴다. 끈 없는 운동화가 신긴 발등을 토닥인다'는 첫 생각을 쭉쭉 밀어 가니 울산암각화박물관 주차장이다. 집안에서 복작거리느니 에어컨 나들이가 최고인 날. 대형 미디어아트가 짙푸른 영상으로 반긴다. 기운 생동하는 억만년 전 공룡들이 튀어나올 듯 살아 움직인다. 원형을 옮겨온 모형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이 좌청룡 우백호의 기세로 양 벽면에 우뚝하다. 중년 여성들을 인솔한 가이드가 바위 그림을 설명한다. 어디 일만 년 전의 울산 앞바다 고래를 찾아볼까. 한 고래, 두 고래, 세 고래… 자그마치 쉰셋이다! 하나씩 색칠해 볼까. 아이스크림 쉰세 개 선물을 걸어 달라고 할까. 코앞에서 온갖 고래와 육지동물과 사냥도구와 사람이 숨바꼭질 중이다. 그들을 사냥하고 수렵하고 가축화해 일상을 이어간 이곳 부족민. 한반도 조상의 일상사를 최초로 보여준 걸작 앞에 조그마한 현대인이 서 있다.

반구대 암각화 일대를 휘어 감으며 흐르는 대곡천. 김동균기자 justgo999@
반구대 암각화 일대를 휘어 감으며 흐르는 대곡천. 김동균기자 justgo999@

라스코동굴벽화가 새겨진 구석기시대를 거쳐, 암각화가 생성된 시기는 지구의 마지막 간빙기인 1만 2,500년 전으로 추정한다. 인류가 동굴을 나와 산과 물과 벌판과 공중에서 먹이를 구한 때다. 

한반도에도 붓 이전에 돌칼과 돌망치가 있었다. 바위 상태에 따라선 조개껍데기, 뿔, 상아, 뼈도 썼을 것이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입으로는 말을 한다. 날렵한 도구로 널따란 바위 판에 자신의 메시지를 새긴 조각가들. 올올의 그림 무늬로 대화하며 노래한 서사시인들. 1970~71년에 발견된 반구대의 두 암각화 외에도, 숨어 있는 바위 그림은 얼마나 될까. 그 섬세한 결을 이은 이 땅의 근현대 예술가들의 손끝은 또 얼마나 다채로운가.

반구대암각화에 새겨진 고래와 거북이 그리고 선사인의 그림.
반구대암각화에 새겨진 고래와 거북이 그리고 선사인의 그림.

박물관의 에어컨을 등지고는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망설인다. 반구교 난간을 꽃 피운 페튜니아 무리를 지나니 갈래 길이 선택을 강요한다. 오른쪽은 반구대암각화, 왼쪽은 천전리 각석. 우리의 얼굴 조상을 먼저 보는 게 도리겠다. 상수리나무와 S라인 대곡천을 따라 걷는다. 늪지대의 나무다리, 잦은 뱀 출몰지, 천변의 대곡리 공룡발자국 화석을 지난다. 오가는 사람들의 발자국이 꽃무늬처럼 찍혀 있다. 편백나무 건너편에 겹겹의 푸른 산과 뜨거운 태양이 펼쳐진다. 굴피나무 그늘 길 앞에 나타난 훤칠한 절벽 바위의 절경을 마주한다.

반구대 암각화의 세부도. 울산대학교 반구대연구소 제공
반구대 암각화의 세부도. 울산대학교 반구대연구소 제공

일만 년 살결도 일천 년 눈빛도 쪼아야 내 것이네
당신, 찰나로 흩어지려 할 때 손발톱이 닳도록 절벽을 걸어야 했네
푸른 물고기 떼 몰아와 대곡마을 울타리에 바다를 가두고
내리 닫은 점박이 표범의 눈동자에 노을 한 산자락 앉히면
뿔사슴은 잉태의 북부여를 아득히 꿈꾸고

일천 년 메아리도 일만 년의 속삭임도 파내야 내 것이네
한낮의 태양 어룽진 널따란 절벽바위 낯짝에
나는 귀를 비비며 뜨거운 뼈의 말을 듣네
달무리 고인 늑대거북처럼 당신이 울컥거리네
하루를 잣은 하늘이 물의 그물눈에 포획될 때
절벽을 내달리던 뒤울이 당신의 짙은 입술 까마득히 잠근 것이었네  
졸시 '반구대에서 건진 당신' 전문.


푸른 산야에 둘러싸인 일만년의 일상이 흘러나온다. 얼마만큼 사랑이 깊어야 바위가 그 세월을 허락할까. 디지털 망원경으로 풍광을 찬찬히 훑어본다. 가늠할 수 없는 인고의 나날을 마주하는 찰나의 눈. 맑은 해 덕분에 V라인 얼굴 조상과 인사를 나눈다. 조업 중인 어부 조상들은 까마득하고, 멧돼지는 땅을 헤집는다. 앉은 호랑이는 포식 후에 쉬는 자세일까. 배불뚝이 사슴이 뛴다. 거북이가 산책하는 나를 돌아볼 듯 쓰윽 머리를 든다. 북방긴수염고래 셋이 물을 뿜고, 새끼 업은 귀신고래와 작살 맞은 고래가 북태평양으로 유영한다. 혹등고래가 물 위로 솟아오른다. 저것은 사냥에서 돌아오는 남편을 환영하는 포즈일까, 아기를 낳은 산모의 자세일까. 팔다리를 벌린 모습이 적나라하다. 부락민들이 포획한 고래를 해체한다. 최고의 맛이라는 고래 턱밑살 '우네' 한 점 얻어먹어 볼까. 한 색상의 그림을 망원경으로 구분하기엔 한계가 있다. 눈도 점점 아파 오고. 가까이서 볼 수는 없나. 안내소 창을 두드렸다.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대곡천 상류에 자리한 천전리 각석. 김동균기자 justgo999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대곡천 상류에 자리한 천전리 각석. 김동균기자 justgo999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돼 있으니, 주변에 구축물 설치를 못 합니다. 근접관광은 박물관에 신청하면 돼요. 문화관광해설사와 펜스 문을 열고 나가 물가에서 볼 수 있지요. 바위 면에 해가 들어야만 잘 보입니다. 요즘은 저녁 6시까지도 선명해요. 4월부터 구월 중순까진 오후 네 시 전후가 좋고요. 시월 중순부터 2월 말까지, 흐린 날과 오전에는 안 보여요. 주변 바위 열 곳까지 350여 점 중 서너 그림만 보이지요. 그림이 다 지워진 거냐고들 한답니다" 

"아, 물에 잠기는 문제요? 사연댐에 높이 6미터, 폭 15미터의 수문 세 개를 2025년 7월까지 설치해서 해결한대요. 암각화 공원도 만들 거라네요" 

암각화 사진 안내판도 크게 제작하고 있단다. 오늘도 멧돼지와 고라니가 천변을 뛰놀고 노루가 대곡천에서 목욕하고 갔단다. 이곳을 찾는 바위 그림의 후손이 사람뿐이랴. 얼마 전 바위 면을 3D로 촬영하고 클리닝 작업을 한 덕에 7월의 태양이 더 환하다. 대곡천과 매미의 아우성에 바쁘게 걸어 다시 박물관으로 온다.

천전리 각석의 세부도. 울산대학교 반구대연구소 제공
천전리 각석의 세부도. 울산대학교 반구대연구소 제공

서둘러 향한 천전리 각석은 박물관에서 대곡천 상류로 1.2㎞(반구대암각화는 하류로 1.2㎞) 거리. 찻길은 빙빙 둘러 5.5㎞가 된다. 문화관광해설사의 집도 안내소도 고요하다. 계곡을 가로지르고 낮은 산길을 오른다. 건너편엔 1억 1,000만년 전의 공룡 발자국 화석이 너럭바위에 흩어져 있다. 돌계단을 내려 땅을 굽어보는 바위 판을 만난다. 동심원과 마름모꼴 무늬가 확연하다. 추상 그림은 내겐 숨은그림찾기와도 같다. 윗면은 청동기 후기의 기록으로 쪼아서 새긴 모양들이다. 기하학적 문양들, 인물상, 암수 한 쌍의 동물상 등이 눈에 띈다. 아랫면엔 신라 6~9세기까지의 그림과 글자들이 선으로 새겨져 있다. 종이책 어디에도 없는 수천 년 메시지가 담긴 높이 2.7m, 폭 9.5m의 바위책. 그 어마어마한 분량을 찰나로 엿보는 나도, 사진만 찍히면 현재의 바위 그림일지니. 

신라 법흥왕의 동생인 사부지갈문왕이 사랑했던 여인과 함께 서석곡(대곡천 일대)을 찾은 내용이 새겨진 천전리 각석 명문 탁본. 대곡박물관 제공
신라 법흥왕의 동생인 사부지갈문왕이 사랑했던 여인과 함께 서석곡(대곡천 일대)을 찾은 내용이 새겨진 천전리 각석 명문의 탁본. 대곡박물관 제공

대곡천을 걷는다
굴피나무 그늘 길 앞 훤칠한 바위 속
귀신고래가 유영하고 사슴이 뛰어노는
선사의 모습이 낡은 기억처럼 희미하고
물길을 거슬러 계곡을 오르면 
기하학적 무늬와 
사부지갈문왕의 일상이 음각으로 남아
그 시절을 증명하는 시어처럼 반짝인다

이곳에는 고대 신라인의 생활사를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승려·귀족·화랑들의 왕래 기록, 돛단배·말·용·기마행렬도, 한자로 된 여러 명문(銘文). 사각으로 구분된 두 명문은 삼국사기 등에 나오는 인명과도 같아 마치 가까운 현실을 들여다보는 것같이 흥미롭다. 오른쪽 새김은 525년 6월 18일. 사부지갈문왕이 누이 등과 놀러 와 서석곡이라 이름 짓고 글자 새긴 이와 사냥한 이, 밥 지은 이를 기록하고 있다. 왼쪽은 539년 7월 3일. 법흥왕의 외동 공주이자 갈문왕의 부인인 지몰시혜(지소부인)가 6세 아들(훗날의 진흥왕)과 어머니와 행차한 기록이다. 이태 전 죽은 남편을 추모했다는 해석, 아들과 나들이한 이가 갈문왕이라는 해석도 있다. 갈문왕이 함께 놀러 온 누이를 사랑했으나 이루지 못했다는 설까지도. 사부지갈문왕은 신라 23대 임금인 법흥왕의 동생이었다가 사위가 됐다. 신라 왕족들은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 근친혼을 마다하지 않았으므로. 

김려원 시인
김려원 시인. climbkbs@hanmail.net 

오랜 세월 동안 바위가 깨져나가고 글자가 훼손된 까닭에 해석은 여태 분분하다. 발견한 지 50년이 지나도록 보존문제로 들썩이는 문화유산의 현주소가 이끼에 검푸르게 덮인 오늘. 선사의 골골을 헤쳐나오는 귀갓길은 삽시간에 고래의 뱃속 같은 어둠에 묻히고. 그 한나절이 내 비망록의 갈피로 접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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