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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

김감우

힘을 다 빼야 
길이 된다는 걸 너는
미리 알았던 게지
축축 늘어진 팔에
주홍의 은유가 고백하길
봄비 오는 날부터 기다렸다고
울음을 참아가며 쇠솔딱새가
밤을 건너는 소리에
마음 먼저 사려 깊어진다
한 때 담 너머 꿈
다 잡을 듯 했으나
경계는 여기까지야 
들릴 듯 말 듯 보일 듯 말 듯
붉은 연지 능소의 입술
오,오 모음만 밤새 중얼거리다
입술 온전히 지고 마는
끝없는 고백

△김감우 시인: 2016년 열린시학 신인상, 시집 '바람은 만지며 놀다' 울산문학 올해의 작품상 수상, 울산문학 편집주간, 봄시 동인.

주홍, 철 들어진 색이다. 희로애락을 진중히 알아 차림한.
 나는 처녀 시절 보라색이 한참 좋았다. 신비의 색, 미래의 꿈이 숨겨져 있는 색이라 생각했다. 그리다 엄마가 되고는 노랑이 좋았다. 노랑을 보고 있으면 아기를 품에 안은 듯 마음이 따뜻해졌다, 꽃그늘 아래 아기는 살짝 신 벗어 놓고 하늘하늘 나들이 가는, 병아리 떼 종종종 개나리 울타리 길을 걸어서 입학하는 아이를 그려보며 설렜다. 그러고 중년을 지나면서 연두가 좋았다, 그 당시 학교에 근무할 때 교실 환경정리를 온통 연두로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반 아이들과 내 아이가 연두를 숙성시켜 아름드리 나무로 자라나는 염원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태화강 남쪽 와와 공원 앞 남산로에는 은행나무 가로수가 줄지어 있다. 이른 봄 새 혀를 닮은 연두색 새순은 꽃보다 예쁘다. 그 당시 일상을 짬 내어 은행잎이 더 커지기 전에 그 길을 몇 차례 다녀오곤 했었다. 그런데 세상을 한 참 살고 난 지금은 주홍이 참 좋다. 주홍을 보고 있으면 젊음이 고맙게 머물러 줄 것 만 같아서다. 아름다운 꿈을 꾸던 노랑과 무릎이 부서지게 열심히 살아낸 빨강을 성숙시켜 얻어진 빛, 인생을 한참 살아낸 후에 알게 된 빛이라는 생각이 든다.  
 
 '힘을 다 빼야/길이 된다는 걸 너는/미리 알았던 게지' 시인은 이렇게 주홍을 성숙시켜 민망하게 들뜨는 나를 차분히 잡아 주기도, '울음을 참아가며 쇠솔딱새가/밤을 건너는 소리에/마음 먼저 사려 깊어진다'로 나를 가리늦게 철들게도 한다. '오,오 모음만 밤새 중얼거리다/입술 온전히 지고 마는/끝없는 고백' 그렇다. 어쩌면 우리는 가장 하고 싶은 말은 모음만 쏟아 내는지도 모른다, 하여 참아름다움은 가슴으로만 읽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시의 결구에서 한으로 남은 능소화의 '끝없는 고백' 읊는다. 이 시구의 해독을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두어 독자들과 호흡을 함께 한다. 시인은 이렇게 행간마다 단아함과 따스함을  묻혀 내고 있다.  

 

서금자 시인
서금자 시인

 지금 담장에는 능소화가 한창이다. 사람들이 그 황홀함에 취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만지면 꽃가루로 눈을 멀게 한단다. 능소화의 끝없는 고백, 아름다움을 함부로 탐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를 시인은 '경계는 여기까지야'로 매몰차게 훈시하며 이루지 못한 담 너머 꿈도 함께 함축시키고 있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때로는 두려움이다. 오늘은 주홍빛 입술연지 짙게 바르고 길을 나서야겠다. 한 계절을 보내는 매미 울음소리를 매미 노래소리로 들으며.  서금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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