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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라(修羅)*

엄계옥

시인이 되고 보니 알겠다
큰 것보다 작고 세세한 것
여리고 힘없는 것에
더 마음이 간다는 것을
꼿꼿하던 고개
사방 면벽보다
발아래를 더 챙긴다
내가 머리 위에
벼락을 이고 살 듯
내 발아래 수수만 년 무수한 생명들
무지막지한 발목을 이고 찰나를 산다
내가 잠깐 한눈 판 사이
무지몽매한 내 발목 스친 자리
개미 한 마리
무너진 어깨 일으켜 세우느라
안간힘을 쓴다
머리 위에 임금 없고
발아래 신하 없는 게 시인이라
나는 그 앞에 무릎 끓고
무너진 개미 일으켜 세우느라
안간힘을 쓴다

*백석 시에서 빌려옴.

△엄계옥: 2011 '유심' 신인상. 시집'내가 잠깐 한눈 판 사이' 장편동화'시리우스에서 온 손님' 산문집'달 속에 눈이 잠길 때'

김감우 시인
김감우 시인

백석의 시 '수라'는 거미에 대한 화자의 행동과 느낌을 쓴 시이다. 거미 새끼 한 마리가 바닥에 내린 것을 무심코 쓸어버린 뒤 그곳으로 찾아온 어미 거미를 보고 가슴이 짜릿하다. 찬 밖이라도 새끼가 있는 곳으로 가라고 다시 그 어미 거미를 문밖으로 쓸어버리고 나서 마음이 서럽다. 그런데 그 설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알에서 갓 깨어난 듯한, 발로 채 서지도 못하는 아주 작은 거미가 찾아온다. 


 그는 손을 내밀어 보지만 어린 거미는 무서워하며 달아나 버린다. 이에 그는 보드라운 종이를 이용해 고이 문밖으로 버리며 거미의 엄마나 형 또는 누나가 이 어린 거미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가까이 있다가 쉬 만났으면 하고 소망하면서 마음이 슬퍼진다.


 수라는 불교에서 싸움을 잘하는 신, 아수라의 다른 말이다. 백석의 이 시는 당시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 상황에 비추어 가족공동체가 해체되는 비극성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엄 시인은 백석의 시에서 화자의 무심코 한 행위에 중점을 두고 스스로의 행동을 경계하고 단속하는 것으로 시상을 전개시키고 있다. 


 '내가 잠깐 한눈 판 사이'는 이 시집의 제목이면서 본문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구절이다. 내가 잠깐 한눈 판 사이에 내 발목 아래에 살고 있는 생명들을 해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산다. 내 무지몽매한 발목이 스친 자리에서 무너진 개미의 허리를 일으켜 세우느라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시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시인이 되고 나서는 큰 것보다는 작고 세세한 것, 여리고 힘 없는 것에 더 마음이 간다는 것이다. 이 책은 엄계옥 시인의 첫 시집이다. 시인으로서의 철학과 가치관이 뚜렷이 드러나 있다. 뿐만 아니라 머리 위에는 벼락을 이고 살며 발 아래에 '수만 년 무수한 생명들'이 있음을 알고 있는 광활한 우주관도 볼 수 있다. 이런 넓은 눈이 있으니 작고 여린 것들의 우주적인 존재감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며 독자의 자리에서, 그리고 같은 시인의 자리에서 새삼 주변과 내 자신을 깊이 돌아보며 '초심'이라는 말을 생각한다. '시인이 되고 보니 알겠다'로 시작하는 이 시의 첫 행에 오래 머문다. 그간 잊고 산 것이 너무 많다.  김감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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