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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숙 수필가
정영숙 수필가

바람이 맑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공원으로 향했다. 산책로 입구에 들어서자 지난해 솔숲 사이에 피었던 청보라 빛 산수국이 떠올랐다. 기대를 안고 수국이 심어진 곳으로 갔지만, 꽃은 아직 피지 않았고, 수국을 에워싼 잡초가 먼저 눈에 띄었다.

 수국이 무리 지어 자라는 곳도 있었지만 심은 지 오래지 않아서인지 기세 좋은 잡초에 치여 겨우 두서너 잎만 고개를 내민 것도 많았다. 쑥, 쇠무릎, 자리공 등 잡초의 강한 생명력에 수국이 기를 펴지 못하고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어린 수국 주변의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잡초도 들꽃이라고 누군가 말했지만, 기왕 수국을 심어 놓았으니 자라는데 방해되는 잡풀은 뽑아내는 게 맞지 싶었다. 평상복을 입고 맨손으로 잡초를 뽑는 모습이 낯설었던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보기도 했다.

 한참 잡초를 뽑고 있을 때 운동을 나온 듯한 중년 아주머니가 다가와 왜 풀을 뽑느냐고 물었다. 드센 잡초 탓에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수국이 안쓰러워 잡풀을 뽑아내는 중이라고 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나 싶더니 풀을 뽑아내면 공공근로 하는 사람들 일자리가 없어지니 그만두라고 말했다. 마뜩잖다는 표정과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조금만 거슬리는 답을 하면 금세 험한 말을 내뱉을 것 같아 무슨 소리냐고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을 눌렀다. 속내를 감춘 채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네요.'라고 응수해 주었다. 무언가 덧붙일 말을 찾는 것 같던 그녀가 더는 할 말을 찾지 못한 듯 쌩하게 가던 길을 걸어갔다. 대충 얼버무려 넘기기는 했지만 느닷없게 몰아세우는 그녀의 태도 때문인지 까닭 없이 궁지에 몰린 느낌이었다. 
 그녀가 모습을 감춘 뒤에도 한참이나 잡초를 더 뽑은 뒤 허리를 폈다. 그녀와 나의 신경전은 아랑곳없이 풀의 횡포에 시달리던 어린 수국들이 햇빛을 볼 수 있게 해주어 고맙다며 환하게 웃는 것 같았다. 호미라도 들고 왔다면 제대로 주변 정리를 해줄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예쁜 꽃을 피워 일상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으면 싶었다. 


 산책을 좀 더 하려다 무례한 그녀의 표정과 말투가 떠올라 포기하고 씁쓸한 마음으로 공원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뭔가 찜찜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다. 꽃을 제대로 보려면 때를 놓치지 않고 잡초를 제거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화초는 섬세한 관리가 필요하지만 한정된 인력으로 넓은 공원의 풀을 하나하나 뽑아내는 것은 사실상 어려울 것이다. 며칠만 신경을 쓰지 않으면 금세 기승을 부리는 게 잡초 아니던가. 잠시 짬을 내어 풀을 뽑은 게 잘못이었을까.


 일손이 미치지 못하나 싶어 수국 생장에 방해되는 잡초를 뽑았을 뿐인데 그것을 두고 일자리가 없어진다며 몰아세우던 모습이 조금은 억지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잡초를 뽑아낸 것이 과연 일자리 빼앗는 행위였을까. 기분 좋게 산책하러 갔다가 낯선 사람의 지청구만 잔뜩 안고 돌아왔으니 언짢은 마음은 쉽게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인이 일자리를 잃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며칠 전 공원에서 만났던 투박하고 거친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가 던진 몇 마디 말 속에는 무수히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힘든 시간을 겪었다면 공원의 풀 뽑는 모습이 일자리 빼앗는 것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녀가 공공근로를 하는 사람이었다면, 아니 그녀 주변의 누군가가 그 일을 한다면 내가 밥그릇을 빼앗는 사람으로 보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일자리 구하는 게 얼마나 힘든 세상인가. 일자리를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각자 처해 진 입장에 따라 어떤 일을 바라보는 시선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경제적인 것과 맥을 같이한다면 그 거리는 더 멀게 느껴질 수도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밥줄이 될 수도 있다. 일자리는 우리 삶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아니 절대적이라 할 만큼 중요한 것이다. 또한, 생계와 직접 연결되어 있기에 실직이 삶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누군가 내 일자리를 위협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불편할까.


 우리 사회를 4차 산업혁명 시대라고 한다.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노동을 통해 먹고 사는 일이 만만치 않다. 그리 풍요롭지는 않더라도 일상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수입을 보장받는 것은 우리 모두의 권리인지도 모른다. 그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이 느끼는 비애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뿐만이 아니다. 일자리는 경제적인 문제만 아니라 사람 관계까지도 달라지게 할 수 있다. 일자리 걱정 없는 환경이었다면 그녀는 나와 함께 풀을 뽑거나 수고한다는 인사 한마디쯤 나누었을지도 모른다. 공원에서 만난 그녀로 인해 일자리 부족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다시 생각해 본다.

 일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직장을 가질 수 있고, 든든한 일자리가 있어서 밥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을 바라는 것은 헛된 꿈일까.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과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노심초사하는 사람들이 떠올라 생각이 많아지는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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