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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산은 신라 때 열박산이라 불렀으며 언제 산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김유신이 삼국통일의 영기를 얻은 산으로 알려져 왔다.
백운산은 신라 때 열박산이라 불렀으며 언제 산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김유신이 삼국통일의 영기를 얻은 산으로 알려져 왔다.

백운산은 신라 때 열박산이라 불렀으며 언제 산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김유신이 삼국통일의 영기(靈氣)를 얻은 산으로 알려져 왔다. 백운산의 상봉을 감태봉, 중봉을 삼강봉으로 불리는데, 감태봉의 유래는 이곳이 백운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김유신이 여기에서 별자리의 우두머리인 허성(虛星:현부)과 각성(角星:금성)의 영기를 받았기 때문이라 한다. 또 삼강봉은 산 맨 꼭대기에 빗물이 떨어지면 태화강, 낙동강, 형산강 세 곳으로 나누어 흐를 만큼 기묘한 분수령을 이루고 있음에 따라 붙어진 이름이다.  

꼭대기에 빗물이 떨어지면 울산의 태화강, 포항의 형산강, 김해 낙동강으로 흘러간다는 삼강봉.
꼭대기에 빗물이 떨어지면 울산의 태화강, 포항의 형산강, 김해 낙동강으로 흘러간다는 삼강봉.

감태봉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신라 진평왕(579~632) 시절 신라는 나라 사정이 어려웠다. 시시각각으로 조여 오는 백제의 위협과 고구려의 압박은 변하지 않았고, 왜국은 항상 위협의 대상이었다. 이후 신라는 '병부'를 설치해 왕이 군권을 장악하고 율령을 공포하는 등 왕권 강화 및 안정을 꾀했다. 진흥왕은 화랑도라는 애국 청소년 기반의 국가조직을 만들었으며, 이를 이용해 대가야를 통합(562)하면서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잡게 됐다. 

원래 김유신은 신라계가 아니었다. 삼국의 역사를 이끈 인물들을 소개한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에 보면 김부식은 김유신을 가장 큰 비중으로 다루고 있다. 김유신의 조상은 신라에 의해 532년(법흥왕 19)에 멸망한 금관가야의 왕족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조부인 김무력 때부터 신라에서 무장(武將)으로 활약하면서 가문을 일으켜 왔다. 김유신의 아버지는 김서현(金舒玄), 각간(角干:신라의 최고위급 관직)까지 올랐다. 그러나 김유신은 망명한 가야계의 후손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이겨내고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을 통일하는 데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입지전적 인물로 평가된다. 

김유신의 수련장으로 추정되는 백운산 감태봉 바위.
김유신의 수련장으로 추정되는 백운산 감태봉 바위.

김유신은 어린 시절부터 심신을 단련하고 무술을 연마해 15세에 화랑이 돼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끌었다. 비록 나이는 어렸으나 많은 사람이 그를 따랐다. 이때부터 김유신은 남다른 기개로 삼국통일의 꿈을 꿨다고 전해진다. 18살이 되는 해 그는 홀로 열박산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 향(香)을 피우고 하늘에 제(祭)를 지낸 뒤 천신(天神)에게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렸다. "신이시여! 우리 신라를 도와주소서! 지금 신라는 그야말로 바람 앞에 등불 신세입니다. 백제의 위협과 고구려의 압박, 왜국의 침략 등으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허덕이고 있습니다. 저에게 힘을 내려주소서!" 열박산의 최고봉인 감태봉 바위에 앉아 불철주야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더기 옷을 입고 이상한 차림을 한 노인이 김유신 앞에 나타나 "보아하니 젊은이는 나이도 어리고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데, 어찌 이런 위험한 곳에서 홀로 있는 냐! 이곳은 맹수와 독충이 많은 곳이므로 자칫하면 목숨을 해칠 우려가 있는 곳이므로 속히 집으로 돌아가"라고 타이른 뒤, 김유신이 뭐라고 말을 붙일 새도 없이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이런 일이 있은후 한 사흘쯤 되는 날, 또 그 노인이 나타나 아직 머물고 있는 것을 책망이라도 하듯이 김유신을 꾸짖는 것이었다. 

김유신은 이 노인이 범상치않은 사람으로 알고, "저는 신라 화랑 김유신입니다. 지금 우리 신라는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형국입니다. 위로는 고구려가 서쪽으로는 백제가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왜국은 수시로 노략질을 일삼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도탄(塗炭)에 빠져 허덕이고 있습니다. 저에게 신라를 구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그런 뒤 고개를 돌려보니 노인은 또다시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런 일이 있었던 뒤 열흘 만에 그 노인이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노인의 행방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하고 김유신은 먼저 노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도움을 간청했다. 그의 정성이 지극한 것에 감동했던지, 노인은 마침내 입을 열어 말했다.

"젊은이는 아직 나이는 어리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고, 세 나라(신라·고구려·백제)를 병합(倂合)할 뜻을 가졌으니, 참으로 장한 일이로다." 

노인은 마침내 보자기에 싸여있는 보검(寶劍)을 김유신에게 내려주고 또 아무도 모르는 신기한비술을 가르쳐 줬다. 김유신은 정신을 가다듬어 노인이 가르쳐 주는 술법을 성심껏 배우고 익혔다. 일러 주기를 마치자 노인은 "이러한 사실을 너만 알고 있고,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 검과 술법은 정의로운 곳에 써야하며, 옳지 못한 일에 쓰는 때에는 도리어 자네의 목숨을 해할 것이니 부디 명심(銘心)하기 바란다"며 당부하고 자리를 떴다. 

김유신은 즉시 그의 뒤를 쫓아 서쪽으로 뛰어 갔으나 노인은 간 곳이 없고 오색(五色)이 영롱(玲瓏)한 무지개만 서쪽하늘에 비춰 있을 따름이었다. 김유신은 그편을 향해 몇 번인가 머리를 숙여 절했다.

이듬해가 됐다. 이웃 나라(백제·고구려·왜)의 노략(擄掠)질이 점점 심해 나라 형세가 더욱 위태했다. 김유신은 잠시도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마침내 보검(寶劍)을 빼어들고 경주(慶州) 남쪽 삼십오리 밖에 있는 단석산(斷石山)을 향해 말을 달렸다. 단석산 정상에 도착하자마자 김유신은 사람의 키보다 큰 둥근 바위를 향해 기합 소리와 함께 바위를 내려쳤다. 순간 바위는 반으로 갈라졌다. 

김유신이 보검으로 내리쳐 두쪽으로 갈라졌다는 전설을 가진 단석산 정상 바위.
김유신이 보검으로 내리쳐 두쪽으로 갈라졌다는 전설을 가진 단석산 정상 바위.

이러한 전설을 뒷받침이라 하는 듯 단석산 정상에는 반으로 갈라진 바위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는 나라를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을 하늘에 맹세한 다음 산을 내려왔다. 그 후 김유신의 보검은 손을 대지 않아도 살아서 움직이는 물건처럼 절로 적을 막아내고, 적장의 목을 베는데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김유신의 장한 뜻을 하늘이 알고 그의 의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었다. 

이후 김유신은 크고, 작은 전투에 참여해 전공을 세우면서 스스로 입지를 다져갔다. 특히 그의 나이 34세가 되던 629년(진평왕 51)에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낭비성(娘臂城)을 함락하는 전공을 세워 크게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고구려 정벌 직후 태대각간이라는 최고관직에 오른 김유신은 한반도에서 당나라의 군대를 축출하는 데 힘썼고,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되찾았다. 그리고 673년(문무왕 13)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평생 자신에게 엄격했고, 신라의 결속을 위해 노력한 장수였다. 김유신의 행적은 오늘날에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된다. 

※이 이야기는 필자가 울주군 두서면 내와리에 살았던 내와 이장 고(故) 김익래 씨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글임.

 

진희영 산악인
진희영 산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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