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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저물 무렵일 것이다

안성길

몸 아픈지 여러 해
어느 해 저물 무렵
내 안 어딘가 서로 부딪혀 금 간 틈으로
해금 같은 물소리 새어 나오는 듯했는데
그때 내 눈길에 마주친
사물들은 오래고 낡은 옛날
일에 지친 어머니 몸에서 번져 나오던
비리고 아릿한 냄새 풍기며
해금처럼 함께 우는 게 아닌가
자꾸만 먹먹해진 나는
인적 없는 비상계단
차곡차곡 발끝에 쌓아 올리며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에
한참을 그러고 섰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눈에 들어온 모든 게 짠하고
서러운 속 감춘 게 보였을 것이다
지천명이 다 이울도록
이 별에 온 이유 찾지 못하고
벌써 아무 일에나 눈시울 붉어지는데
부딪친 모서리마다 불쌍하고 가여워
안아주고 싶은 나이 되었다
어쩌면 이리 허둥거리다
아마 이 별 떠날 때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내 비록 흙강아지로 살았어도
이 모든 것에
감사의 큰절은 하고 가야겠다.

 

△안성길 시인: 울산 강정 출생. 무크지 '지평'1987년 7호와'민족과 지역'1988년 창간호로 등단. 계간 '해양과 문학'2008년 10호 평론 활동 시작. 시집 '빛나는 고난''민달팽이의 노래'외 3권. 논문 '박재삼 시 연구''이상국 시 연구''서덕출 동요 연구'외 다수. 평론집 '고래詩 생명의 은유''지역문학, 그 날것의 미학'. 바다 동인. 봄시 동인. 울산시민학교 국어교사.


 

김감우 시인
김감우 시인

먹먹하다. 비 오는 시월 아침, 안성길의 시를 다시 읽는다. 


 위 시는 봄시동인지 11호 '해바라기 머리와 저녁 발자국'의 '안성길 편'에 실린 마지막 작품이다. 유쾌하고 맑은 시인의 성품이 거울 비춰보듯 드러나 있어 마음이 아리다. 두 주 전, 느닷없이 날아든 비보에 우리는 말을 잃었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이리 황망할 줄 몰랐다. 그의 시를 읽는 일이 추모행사가 될 줄 몰랐다. 


 시민학교의 제자들이 가져다준 오이 두어 개로 시를 쓰고는 그 제자의 표정으로 웃던 따뜻함의 소유자였다. 우리는 매월 만나, 정해둔 책 한 권에 대해 토론하고 자작시를 합평하는 자리를 갖는다. 그 자리에서 안 시인은 느릿느릿 조곤조곤, 하지만 분명한 맥을 짚어가며 의견을 말했다. 그리고 더러는 동인들의 자작시에 밑줄을 그어가며 쓴소리도 서슴지 않았다. 독서와 글쓰기, 가르치는 일, 등 어느 하나 소홀히 하지 않았던, 내가 본 그의 삶은 '열정'과 동의어로 보였다. 


 '몸속에서 해금 같은 물소리 새어 나오는' 것을 감지한 맑은 귀를 가진 그는 무언가 예감했던 것일까. '감사의 큰절은 하고 가야겠다'는 마지막 행이 이별 인사가 되리란 걸. '눈에 들어온 모든 게 짠하고/서러운 속 감춘 게 보여' 라는 마음이 그의 시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립다. 유쾌하고 따뜻한 시인, 시와 사람이 똑같았던 시인. '부딪친 모서리마다 불쌍하고 가여워' 지나치지 못하고 쓴, 혹은 써낼 그의 시가 그립다. 
 평론집 '지역문화, 그 날것의 미학'에서 "도대체 무소불위, 정체불명, 안하무인의 저 '중앙'은 어디이고 누가 만든 것일까?"라고 거침없이 외치던 그의 목소리가 그립다. 김감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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