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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불재의 억새평원에 오르는 등산객들. 김동균기자 justgo999@
신불재의 억새평원에 오르는 등산객들. 김동균기자 justgo999@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여울에 아롱 젖은 이지러진 조각달/ 강물도 출렁출렁 목이 멥니다// 아아…."
맞잡은 손을 느릿느릿 흔들며 중년 남녀가 흥얼거린다. 자갈과 신발이 자꾸만 쑤군거려서 뒤로 바짝 다가갔다. "아아 뜸북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잃어진 그 사랑이 나를 울립니다/ 들녘에 떨고 있는 임자 없는 들국화/ 바람도 살랑살랑…." 3절을 다 마치고는 서로의 손바닥을 부딪친다. 가을밤의 부부 모임에 대비해 노래를 연습하는 걸까. 뒤따르는 청중이 눈치채지 못하는 소곤거림에 미소가 피어난다. 억새를 보러 가는 산길의 으악새 가락에 발걸음이 가볍다. 으악새가 억새인지 왁새인지 말도 많지만, 오래전 떠난 작사가는 말이 없다. 시인이 발표한 시가 어떻게 해석되든 독자의 몫이듯, 으악새가 풀이면 어떻고 새라면 어떤가. 풀도 소슬바람에 울어 예고, 새도 소슬바람에 슬피 운다. 울기만 하는가. 가을을 바짝 몰아와 춤추는 맵시에선 누구라도 눈을 뗄 수 없을지니.

# 자연, 사람, 삶, 사랑의 바람결에 터지는 감탄
손주가 중2는 됐을 법한 두 친구가 "이 길이 간월재로 가는 가장 평탄한 길이대이. 인자 우리의 등반 실력은 젤로 낮은 레벨 아니가. 언제부터 이래 됐노?" 나누는 대화는 하소연이지만 나 같은 저질 체력에는 에스라인으로 굽이치는 길이 최상의 코스. 간월재까지 차가 오르내리는 임산도로이니 뭐. 그런데 으악, 일행을 놓쳤다. 헐레벌떡 돌길을 헤치며 뛰어가니 저만치 서 있는 세 남자. 오늘 산행의 동반자인 내 가족이다. 큰애가 마련한 새 등산화 네 켤레로 다시 나란히 걷는다. 억새밭을 향하는 주변의 발걸음이 자잘한 돌멩이 숫자만큼 북적인다. 등산로 입구의 도롯가에 일렬로 주차된 끝 모를 차량 행렬 같다. 아이와 강아지를 금쪽같이 품은 가족들, 만면이 사랑꽃인 연인들, 입만 갖고 가도 청량한 물길이 날 듯한 친구들이 끼리끼리의 보폭으로 걸음을 맞춘다. 보라색 열매를 구슬같이 매단 작살나무에 심장이 꽂히고, 갓길을 꽃 피운 연보라와 흰색의 구절초에 눈길을 뺏기고, 진보라색 꽃대를 올린 꽃향유의 보랏빛 향기를 킁킁거리느라 나는 남성 가족을 놓치기 일쑤다. 그럴 때마다 노란 고들빼기꽃처럼 머리칼을 나부끼며 기다려주는 세 남자. 여름 소나기 같은 감정들은 어디로 갔나. 가을이니까, 멀어도 가까이 보이는 맑은 계절이니까. 다시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아까 본 뒷모습을 보고 또 보며 가까이 더 가까이 억새밭을 줌으로 당긴다.
 
햇빛 좋은 가을날/ 영취산 정상에 올라서서/ 간월재 산허리 올라서서/ 신불산 억새평원 걸어보았는가./ 아무 생각 없이/ 길 없는 은빛 산길 걸어 보았는가.// 이승인 듯 저승인 듯/ 세상은 온통 은빛 축제/ 삶은 축복이어라/ 사랑도 축복이어라.// 신불산도 타오르고/ 너와 나 가슴속/ 묻어둔 그리움도 타오르는 가을 산// 
 - 김성춘 '신불산 억새' 부분

 
 간월재에 올라선 순간, 신불산을 돌아 나온 그리움이 몰아친다. 해발 900m 고지의 산중 평야에 일렁이는 은빛 물결, 가을빛 파도가 밀어 올리는 탄성은 어디서든 "와아!" 자연과 사람과 삶과 사랑의 바람결은 이 한마디면 충분하다. 은빛 축제 속을 허우적대다 또 가족을 잃어버렸다. 에고, 핸드폰은 사진만 찍는 기계가 아니지. 신불산 억새도 식후경이렷다. 간이식탁이 마련된 곳으로 바람을 가르며 뛰었다. 붙박이 나무 테이블은 이미 매진됐다. 나무데크 바닥을 고른다. 넓디넓은 산정의 가을 식탁이다. 발자국과 바람이 숱하게 머물렀겠지만 쪼그려 앉을 자리가 있어 그저 고맙다. 3분의 기다림이면 충분한 김밥, 복순도가 한 병이 꿀맛이라면 곁들인 식후 커피는 감칠맛. '바람도 쉬어가는 간월재 휴게소' 앞에 줄지어 선 100여 명을 미리 탐사하고 온 작은애의 구상 덕에, 집에서 끓여온 김칫국 넣은 컵라면은 지상 최고의 맛. 세 남자가 신불산 그 세찬 바람에 날려가도 모를 지경이다. 자연, 사람, 삶, 사랑을 나무젓가락에 돌돌 만 예의 와아, 감탄사를 남편이 연발한다. 우리의 환호가 억새면 어떻고 라면이면 어떻고 햇살이면 어떠한가. 뇌가 따듯해지는 순간이 축제이고 축복이어라.
 
 예상외로 바람이 억세다. 떨리는 몸에 햇살을 붙들어 매며 단감 한쪽을 집는 순간, 눈앞의 테이블을 바람이 휩쓸었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세 친구의 즐거운 밥때였건만. 바람이 푼 두루마리 휴지를 감던 친구 1의 컵라면이 반쯤 먹은 주먹밥을 말아 바닥에 흩뿌려졌다. 먹던 컵라면을 붙든 친구 2와 3의 주먹밥도 곧바로 나뒹굴고. 바람의 장난은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으나 이 사태를 어째. 바닥을 말끔히 닦아내고 자리를 뜨는 아이들. 가방에 든 귤이라도 줘야겠다며 뒤적거리는데 어느새 바람은 바람같이 가버렸다. 10만여 평의 능선을 흔들고 놓아주고 흔드는 저 기세. 한창 물오른 억새꽃이 서로의 어깨를 끊임없이 비빈다. 이럴 땐 눈보다 귀가 정승이다. 허공에다 가만히 귀를 내민다. 으악 으악 으악새 으악새 으아악새…. 속이 빈 가녀린 줄기로 저 헤아릴 수 없는 바람의 날개를 받아내는 일이라니. 자잘한 이삭꽃이 바람을 들이는 소리가 방울마다 멍울지는 울산 앞바다 파도를 닮았다. 그곳의 갈매기 울음까지 흔드는 으악새의 깊고 먼 그리움. 흰 등짝과 갈빛 앙가슴을 내어주며 햇살과 바람을 그러안는다. 흔들흔들, 차마 꼿꼿한 그리움이다. 그리움의 자리는 오직 한 곳, 당신의 가슴과 등을 관통하는 거기. 거기를 향해 먼 길 달려온 햇살과, 바람과, 사람의 눈빛은 그래서 억새와 동색이다.

신불재에서 신불산 정상까지 기찻길 처럼 펼쳐진 등산길과 억새 평원.   김동균기자 justgo999@
신불재에서 신불산 정상까지 기찻길 처럼 펼쳐진 등산길과 억새 평원. 김동균기자 justgo999@

 간월재 양쪽의 산꼭대기를 올려다보며 하늘억새길을 상상한다. 깊고 푸른 하늘을 머리에 이고 가을을 어깨동무해서, 해발 1,000m 이상의 억새 물결을 헤엄치는 여정은 어떤 짜릿함일까. 고지대를 대비한 겉옷 한 장 챙기지 않았으니 눈길이 먼저 주저앉는다.
 
오늘 이곳에 와보니/ 삶의 피난처 참 많아라/ 바람의 폭포 속을 헤쳐 나와/ 자연 앞에 기꺼이 패잔병이 되는 사람들/ 늦가을, 억새 군단 속으로/ 하얗게 무리 지어 투항하네/ 아, 계산 없이 함몰돼야/ 저렇게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구나/ 
 - 신춘희 '사자평에서' 부분

 
 컵라면과 삶은 달걀 한 개로도 족한 산중의 사람들이 삶의 피난처로 풍덩 뛰어든다. 나무계단을 오르내리며 억새가 내어주는 어깨에 그간의 바람을 마구 발설한다.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저 마을로 가면, 잊고 말 짙은 자연의 고백을 억새꽃에 깨알같이 매단다. 새봄에 돋아날 그 말을 들으러 당신은 진달래를 지나와 이 재를 또 넘고 있으리니.
 
# 새 봄, 진달래 지나와 이재를 또 넘고 있으리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간월재 휴게소의 줄이 몇몇 사람으로 짧아졌다. 간월산 대피소 건물의 화장실이 현대식으로 변해 두려움을 잠깐 잊었다. 얼마 전까지도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하던 어릴 적 기억이 고스란히 되살아난 곳이었다. 시월 중순인데도 산중의 바람은 신발 속까지 파고든다. 지겨웠던 마스크마저 그리운 산정의 이 양가감정. 온몸을 억새 바람에 맡겨두어서인지 하산길이 후들거린다. 강아지도 다섯 살 아이도 내달리는 길이건만. 오를 때 피했던 양지쪽을 일부러 찾아다닌다. 내려가는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다. 나뭇가지에 걸린 하오의 햇살을 당겨 입은 야생화들이 한결 예뻐졌다. 문득 등 뒤를 울리는 사이렌 소리. 산악구조대 구급차 뒷좌석에 두 중년이 무너져 있다. 다리에 쥐라도 난 걸까. 음주로 인한 낙상사고일까.
 

김려원 시인 climbkbs@hanmail.net
김려원 시인 climbkbs@hanmail.net

 등산로 출구에 느지막이 핀 개망초가 반긴다. 길가 포장집에서 어묵꼬치와 국물을 뜨끈히 나눠 먹고 승용차로 향했다. 등산로와 가까운 곳에는 주차가 어려웠으므로 15분여를 더 걸었다. 전봇대와 벽면 여기저기에 나부끼는 '흰색 실선 구간에만 주차 가능' 플래카드가 도도하다. 실선 구간에 주차한 오늘의 차량은 얼마나 될까. 확인할 길은 없지만 빈 곳을 찾아다닌 초조함으로 치자면 1,000대쯤! 큰애가 뛰어가더니 차를 끌고 왔다. 흐느적거리는 엄마를 200m는 덜 걷게 해주는 센스쟁이. 다섯 시간의 신불산 억새평원 등반 대장정이 끝났다. 스마트워치를 본다. 2만2,926걸음. 다들 적이 놀란다. 첩첩의 흰 구름 같은 영남알프스는 푸르고, 웅장하고, 묵묵하다. 하늘은 드맑다. 한 해의 불꽃이 기세를 올리듯 영남알프스에도 그 같은 단풍이 들겠다. 배내고개 꼬부랑 길가에 줄지어 선 으악새가 안녕, 안녕, 저녁으로 가는 갈빛 손을 높이 흔든다. 너희도 이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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