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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순 수필가
배정순 수필가

내 안에는 나도 모르는 내가 숨어 산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놈이어서 더러 곤혹스러울 때도 있다. 어제가 그런 날이었다.

반듯한 성품으로 여러 문우의 모범이 되는 선배님의 차를 얻어 탔다. 자주 어울릴 기회가 없었던 분이라 이물 없는 자리는 아니었다. 

그런 자리에 끼면 말주변이 없는 나는 대화가 궁해진다. 가만있으면 중간은 가는데 그걸 못 참고 한소리 거들다 보면 아차! 하는 순간 놈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만다.  

화제에 오른 인물은 나와 가까운 사이였다. 요 근래에 의견이 맞지 않아 관계가 소원해진 친구였다. 

마음이 꼬여있던 터라 내가 건네는 말속엔 불필요한 군살이 따라붙었다. 말할 때의 시원함은 잠깐, 시간이 흐를수록 그 불편함은 떫은 감 씹은 맛이었다. 

이 나이쯤 되면 대화가 궁하더라도 할 말 안 할 말은 가려 하는 중심은 서 있어야 하는데 아직도 감정 다스림이 미숙한 탓이다.  

기분이 찝찝해서 깊은 밤인데도 눈이 초롱초롱했다. 나는 정직하게 산다고 생각했는데 한 꺼풀 벗겨보니 아니었다. 

근거 없는 말은 아니지만 부풀려 말하고도 의식 없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한데 요즘은 그게 목에 걸린 가시처럼 껄끄럽다. 

나이 탓인가? 떳떳하기 위해서는 선배에게 이실직고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지 싶었다. 

사실 크게 드러나지 않는 말이니 선배가 눈치를 못 챘을 수도 있다. 그냥 넘어갈까 하다가 이 시점에서 제동을 걸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그런 삶이 이어질 것 같아 덮고 넘어갈 수 없었다. 말속에 뼈가 있다는 걸 선배는 몰라도 내 양심은 알고 있다. 죄의식보다 양심을 거스른 것에 자책감이 커 고백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선배에게 전화했다. 받지 않았다. 발신자가 뜨면 전화 주시겠지, 주실 거야 하며 기다렸다. 여전히 답은 오지 않았다. 다시 전화할 용기도 나지 않았다. 

여느 때라면 저녁에는 잘 가지 않는 성당을 찾았다. 가자마자 고해소에 들어 신부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평소에 제가 실언을 잘합니다. 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화제에 오르면 있는 사실에 말을 부풀려 말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중언부언하지 않았다. 신부님은 "습관적인 말은 쉬 고쳐지지 않습니다. 살아온 세월만큼 바루는 데 시일이 걸립니다. 말을 줄이는 것도 한 방법이지요" 하셨다. 

고백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신부님의 때 묻지 않은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얼크러진 실마리가 풀리는 듯했다. 

긴긴 세월 몸에 길든 습성이 하루아침에 바로잡히기를 바라는 것도 욕심이다. 당장 효과가 나지 않더라도 조급해하지 말자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남을 비난하는 마음에는 '나는 바르게 살고 있다는 마음이 전제한다'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부실하기 짝이 없는 내가 정한다. 

내가 남을 판단할 정도의 인격을 갖춘 인물인가. 아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릴 때는 번번이 일을 그르치고 난 후라는 게 아이러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면 상대도 나와 같은 마음이리라. 세상에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라는 설문을 본 적이 있다. 

열 명 중 세 사람 정도가 나에게 호의적이면 괜찮은 상태라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맞지 않는 사람들과 맞춰가며 산다는 얘기다. 한배를 타고 나온 일란성 쌍둥이도 마음이 다르다는 데 생판 다른 남이야 말해 뭣할까. 

맞지 않는다고 나처럼 흠집 내기를 일삼는다면?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가라앉는다. 

언젠가 들은 강론이 새롭게 떠오른다. "교회에서 죄인이라는 말은 우리는 모두 하자가 있는 인간이라는 말이다. 세상 어디에도 완벽한 사람은 없다. 한데 사람들은 교회를 선한 사람이 모인 공동체로 착각한다. 흔히들 교인의 허물을 보면 교회 다니는 자가 왜 저래? 한다. 아니다. 교회는 죄인들이 모인 공동체다. 교인이 낮아지고 낮아져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다. 교회공동체는 죄인들의 집단이지만 뉘우쳐 회개하는 걸 전제로 모인 단체다"라고 하셨다. 

그 말씀에서 위안받곤 한다. 부실한 인간이기에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을 흠잡는' 우를 범하곤 한다. 

조물주는 태초에 완벽한 사람을 창조할 수도 있지만 부실하게 만든 건, 서로 부족함을 채워가며 살라는 의미가 아닐까. 

젊은 날엔 생각 없이 기분 내키는 대로 지껄이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았다. 요즘 들어 이러는 건 잘못을 만회할 날도 그리 많지 않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아니, 당장 마음이 불편해서다. 이 아까운 시간을 자책감에 빠져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실언하지 않겠다는 섣부른 장담은 하지 않는다. 다만 돌발 사고를 일으키는 내 안의 놈을 다독여 그 횟수를 줄여나가야겠다. 

살날이 많지 않은 시점, 나의 그릇됨을 고백하는 방법으로라도 마음을 바로잡아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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