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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짓궂다. 구름이 포개져 금세 비라도 뿌릴 듯 낮게 내려앉았다.
저기 포항 호미곶 어디쯤 가다 보면 너른 벌판의 풍경과 세한도가 중첩된다.
봄이면 청보리로 뒤덮이고, 늦은 가을이면 늙은 옥수수 대 서걱대는 벌판에 옹기종기 선 소나무 몇 그루가 추사를 소환한다.
 
추사 김정희는 정조에서 철종의 세도정치가 관통하는 시대를 살다 간 서화가이자 실학자였다. 또한 금석학을 성립하고 추사체를 완성한 문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이 끊임없이 서로의 영역과 자리를 넘보는 싸움에서 추사는 패했고 꼼짝할 수 없는 음모 속으로 던져졌다. 불온한 시대였고 삶은 선명하지 못했다. 그의 나이 55세였다. 추사는 제주에 위리안치됐지만, 조정은 끊임없이 사형을 상소했다.
추사는 크지 않는 한지 위에 한 채의 집과 고목 몇 그루가 풍기는 겨울을 그렸다. 투박한 붓끝에서 정제되지 않은 획으로 유배지의 서늘한 슬픔을 담았다. 한쪽에 한겨울 추운 날씨가 돼서야 송백이 시들지 않음을 비로소 알 수 있다는 歲寒然後知 松栢之後凋 논어의 한 구절을 가져와 세한도라 이름 붙이고 제자 이상적에 대한 고마움을 적었다. '그대는 나에게 귀양 이전이라고 더 해준 것이 없고, 귀양 이후라고 덜 해준 것이 없다.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게 없었지만, 이후의 그대는 성인의 칭찬을 받을 만하지 않겠는가?'
 
이상적은 조선의 한어 역관으로 스승에 대한 존경과 사랑으로 수천 리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상적은 청을 다녀올 때마다 구하기 어려운 책들을 어렵게 마련해 전했다.
권력에서 밀려난 뒤 등 돌린 사람들, 계속되는 음모에 항거할 수 없는 고립된 처지. 이런 추사에게 책은 내면으로 향할 수 있는 유일한 낙이었을 것이다. 그 길을 이어준 제자에게 보답으로 건네준 것이 세한도였다.
 
이상적은 청을 방문할 때 세한도를 유명한 문인 16명에게 보이고 평을 받아 첩부했다. 후에 조선의 찬탄이 더해져 세한도는 14m의 길이로 장대해져 빛나는 보물로 남았다. 유배지에서 피워낸 그림 한 장이 주는 큰 울림은 미려한 기법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와 제자에 대한 고마움을 꾸밈없이 담은 진솔한 추사의 마음이다. 
 
우연히 마주한 풍경이 사람으로 이어지는 미세한 결에, 문득 따뜻하다. 비에 젖은 바람에 수숫대 몸 푸는 소리가 귀를 채운다.  
 글·사진=김정규기자 kjk@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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