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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수 수필가
이상수 수필가

붉은 찻잎을 집는다. 손끝에서 사막의 시간이 버석거린다. 오래 건조된 꽃잎은 금방이라도 흑자줏빛 바람을 일으키며 허공으로 날아갈 것 같다. 따끔해서 들여다보니 엄지손가락에 살짝 피가 맺혔다.
 신에게 바치는 꽃을 마시려고 해서 질투하는 걸까? 히비스커스라는 꽃 이름은 이집트 미의 여신인 hibis와 그리스의'같다'는 의미인 isco의 합성어이다. 무궁화종의 하나로 하와이무궁화라고도 부르는데, 나팔 모양 가운데에 노란 수술이 솟아있고 통꽃이라 동백처럼 한 번에 진다. 아름다운 몸매와 피부 유지를 위해 클레오파트라가 애음했고 타히티 여인들이 머리에 꽂고 치장한다. 꽃과 여인을 자주 그린 천경자의 그림에도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다.  
 하얀 민무늬 도자기 잔은 투명한 유리와 달리 경계가 분명해 좋다. 꽃잎 두 개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 첫물은 잎을 부드럽게 만들기에 그대로 버리고 다시 물을 따르고 가만히 기다린다. 국화나 목련차처럼 활짝 피지 않고 말린 형태 그대로를 유지하는 건 쉽게 제 고집을 꺾지 않겠다는 의지 같다. 조금씩 불그스름한 빛깔을 풀어내며 석류 빛으로 우러나면 마시기 가장 좋을 때가 된다. 

 아름다운 것들은 대개 가시를 품고 있다. 가시가 없다면 장미의 고혹미는 반감될 것이며 용설란은 그 의미를 잃어버릴 것이다. 가시복처럼 표면에 드러내든 양귀비처럼 제 안으로 감추든, 어쩌면 그것은 자신만의 개성일지도 모른다. 
 수더분한 외모를 보고 주위에선 나를 편한 사람으로 오인한다. 그러나 조금 지내다 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원칙에 어긋나는 것은 따르지 않으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을 싫어한다. 무엇보다 대가를 치르고도 정당한 권리를 찾지 못하는 걸 참기 어려워해 단체에서는 별로 내켜 하지 않는 타입이다.  
 독일의 피아니스트인 마우리치노 폴리니는 늘 같은 피아노를 고집한다. 해외 공연이 있을 때는 비행기로 이송하는데 현지 최고 오케스트라 단원 모두를 채용할 만큼의 경비가 든다고 한다. 조율사와 직접 동행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 독특한 까탈스러움이 훌륭한 연주를 하게 하는 것이리라. 

 나의 가시는 대체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겨날 때가 많았다. 결정 장애를 가지고 있거나 자기 의사를 분명히 밝히지 않는 사람에겐 단호했다. 가치관이 맞지 않을 때는 가까이하지 않았다. 간혹 그런 선명함 때문에 따돌림을 받을 때가 있었다. 고쳐야지 하면서도 쉽게 거둬들이지 못하는 내게 누군가 가면을 써보라고 충고해 주었다. 뾰족해질 때마다 미소로 덧씌우고 나면 관계가 원만해질 거라며.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까다로운 면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거짓말하지 않는 정직을 가장 앞세우고, 혹자는 남의 물건을 탐하지 않으며, 타인에게 폐 끼치는 것을 매우 꺼린다. 어쩌다 은혜를 입게 되면 되갚아야 마음이 편한 경우도 있다. 
 가시는 그만의 삶의 방식을 가진다. 때로는 상처받지 않기 위하여 무장하고, 가끔은 '더는 다가오지 마세요.'라는 경고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고유한 표식이 아닐까 싶다.  
 중국의 소동파가 죽음과도 바꿀 수 있는 맛이라 극찬했던 탕(湯)은 자신을 보호하려 강력한 독을 지닌 복어로 끓인다. 그 독은 소량으로도 사람을 치사케 할 수 있지만 적절히 사용하면 암의 성장과 전이를 효율적으로 억제할 수 있다고 한다. 사약의 재료였던 부자는 뜨거운 약성으로 야뇨증과 양기부족에 특효약으로 쓰인다. 

 명품은 까칠함에서 탄생한다. 170년의 역사를 가진 에르메스는 원리원칙을 강조하며 모든 제품을 본국에서만 제작한다. 샤넬은 불편한 코르셋으로부터 여성을 해방시켜 자유를 선사했다. 작가가 심사숙고해 선택한 언어의 질감, 운동선수가 갈고 닦은 기술, 장인의 완벽을 향한 집념 등도 그런 정신의 산물이리라. 
 살아오면서 가시가 많았다. 날카롭고, 단단하고, 고집스럽던 것 중의 몇 개는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제리코장미처럼 제 내면을 찌르며 좀 더 부드러워지라고 말해야겠다.
 꽃잎을 건져낸다. 색과 향을 내어놓았지만 모양은 마른 잎 그대로다. 달큰한 맛은 어쩌면 제 안에 향기로운 가시를 품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히비스커스를 마시면서 내 안의 모남을 다스리는 건 또 다른 이열치열이리라. 손가락에 맺힌 핏방울이 언제 그랬냐는 듯 옅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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