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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원 시조시인
이서원 시조시인

지인과 나란히 앉았다. 태화강 물결이 은빛으로 반짝인다. 본색(本色)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무든, 풀이든 본연의 태깔이 있다. 그러나 어느 게 진짜인지는 알 수 없다며 웃었다. 시간과 계절에 따라 변하는 것이 진리이듯, 사람도 다를 바 없다. 순수했고 진실했던 과거의 모습이 본색이었을까. 아니면 욕심에 가득 찬 지금이 그 사람 본연의 모습일까.
 믿는다는 건 참으로 자신을 내려놓는 일인가 싶어 갸우뚱한다. 우정이 사라진 시대라고 한다. 모든 것이 사랑으로만 통용되어 진정한 벗의 의미가 퇴색되어 버리고 말았다. 노란 은행잎이나 붉은 감나무 잎을 책에 꽂아 두었다가 엽서를 만들 때 사용했던 기억이 있다. 벗 우(友)자를 쓰고, 첫 문장에 온갖 정성을 들였던 십 대 때가 어제처럼 또렷하다.


 "천하에서 가장 친밀한 벗으로는 곤궁할 때 사귄 벗을 말하고, 우정의 깊이를 가장 잘 드러낸 것으로는 가난을 상의한 일을 꼽는다. 아! 청운(靑雲)에 높이 오른 선비가 가난한 선비 집을 수레 타고 찾은 일도 있고, 포의(布衣)의 선비가 고관대작의 집을 소맷자락 끌며 드나든 일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게 절실하게 벗을 찾아다니지만 마음 맞는 친구를 얻기는 어려우니 그 이유가 무엇일까? 내 친구 백영숙(야뇌 백동수 1743~1816)은 재기가 뛰어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세상에서 노닌 지 삼십 년인데도, 곤궁하여 세상과 뜻이 맞는 바가 없었다. 이제 양친을 모시고 먹고 살기 위해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려 한다. 아아! 서로 곤궁했기에 사귐이 시작되었고, 가난했기에 말을 나눌 수 있었으니, 나는 이것이 몹시 슬프다. 비록 그러하나 내가 영숙에게 어찌 다만 곤궁할 때의 친구일 뿐이겠는가? 그 집에 이틀 치의 땔감이 없어도, 서로 만나면 차고 있던 칼을 벗어 술집에 저당 잡혀 술을 마셨다. 술이 취하면 큰소리로 노래 부르며, 업신여기고 욕하고 즐거워하며 웃곤 했다. 천지의 슬픔과 기쁨, 권세에 따라 변하는 인심,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마음을 함께 터트렸던 것이다." 

 초정 박제가가 백영숙과의 이별이 아쉬워 쓴 편지다. 백영숙은 당시 최고의 무예가였다. 서얼 출신의 차별로 이때까지 벼슬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주위에는 수많은 벗이 있었다. 이덕무, 박지원, 성대중 등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과 교류했다. 그는 무협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어 협객으로 살았다. 처음부터 가난하게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영숙의 집안은 본디 넉넉했지만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하기를 좋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가업은 흩어지고 기울었지만 베풀어줌은 그치지 않았다."고 성해응이 남긴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우직하고 멋있었으며 진정한 도리를 알았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벗들을 뒤로하고 기린협(지금의 강원도 인제)으로 떠나게 되었다. 한 번 이별하면 다시 돌아오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세상을 잊는 일 또한 대장부에게 얼마나 큰 시련이었겠나. 
 10년의 낙향 시절을 그렇게 보내는 동안 세상은 조금씩 변화의 기운이 흘렀나 보다. 정조 즉위와 함께 친위군인 장용영을 조직하며 서얼 무사들을 등용하였다. 역시 영숙은 창검의 일인자로 추천받아 어영청 초관에 임명되어 한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벗을 다시 만난 그날의 해후가 얼마나 기뻤을까. 이덕무, 박제가와 더불어 정조의 명을 받아 훈련용 병서인 무예도보통지(조선 후기 무예 훈련 교범)를 편찬하게 되었다. 함께 의지하며 돈독한 우정을 쌓으며 병서를 만드는 일은 참으로 신나고 즐거웠겠다.

 서로를 알아주고 격려하며 인생을 사는 것만큼 낭만적이고 멋스러운 게 어디 있나. 이 시대는 우의와 인정 나누는 일을 손바닥 뒤집듯 한다. 특히, 정치를 보면 참으로 우스꽝스럽고 낯간지러운 장면이 어디 한둘이던가. 툭하면 철새처럼 당을 바꾸는 일은 이제 놀랍거나 별스럽지 않다. 저 200년 전의 사귐이 지금은 왜 없을까. 세태를 탓하랴! 인정을 탓하랴! 
 "어찌 이별의 갈림길에서 머뭇거리며 근심하겠는가. 서울 안에서 먹다 남긴 밥을 찾아다니다 싸늘한 눈초리를 받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서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하며 살아야겠는가? 영숙이여! 갈지어다. 나는 곤궁 속에서 벗의 도리를 얻었다. 그러하나 영숙에게 있어 내가 어찌 가난할 때의 벗일 뿐이겠는가!" 
 이별은 누구에게나 아프다. 저토록 다정한 벗을 보내는 일은 땅을 치며 하늘을 원망해도 부족하다. 가난이 무슨 죄이며, 출생과 집안의 가문을 왜 따져 가슴 미어지게 하는가. 10년 뒤에 돌아올 날을 알지 못한 채,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양 슬픈 손 흔듦이 애잔하다. 그대는 지금 이런 두 사람과 같은 벗을 가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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