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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화 수필가
윤경화 수필가

골짜기마다 수수가 붉게 익는 가을날, 산길 따라가는 영월 여행의 맛은 향기롭고 달았다. 변덕스런 이상 기후에도 맺힌 데 없이 자연은 곱게 물들어가고, 비탈밭은 어느 암자에서 본 이불 모서리처럼 둥글고 푸근해 끝없이 말을 걸어 본다. 이처럼 강원도의 고졸한 기운은 범상치 않아 기대감으로 마음이 설레었다.
 영월은 소나무가 참 좋은 고장이다. 키가 크고 청정한 나무가 뿜어내는 기운은 대체할 수 있는 게 없을 듯했다. 여행자가 현장에 섰을 때만이 경험할 수 있는 고유한 느낌이다. 그 기운은 마치 밝고 환한 이상 세계로 초대를 받은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여기에다 이미 유명해진 장소에서도 볼 수 없는 의외성을 만났으니 오랫동안 잊지 못할 추억을 얻은 여행이 된 셈이다.
 음식 역시 설렘을 주는 요소다. 모처럼 외지의 식당에서 강원도라는 지역 특성이 녹아 있는 아침 식사를 했다. 두부찌개와 도라지무침, 통감자 조림, 메밀묵 등이 정갈하게 식탁에 올랐다. 식사 분위기는 여유와 즐거움이 어우러져 문화의 향기까지 더해지는 듯했다. 일행의 표정은 싱그럽고 몸짓에서는 활기가 넘쳐 팬데믹 이후 오랜만에 정서적 포만감을 맛보았다. 기꺼운 순간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조금 전 펄펄한 분위기 속에 있던 사람들은 어느새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누군가 "사장님, 화장실이 어디인가요?"라고 묻자 분주한 손길을 멈춘 사장이 "예, 나가서 왼쪽에 있는 '소나무집'입니다."라고 했다. 왼쪽에 과연 소나무집이 있었다. 소나무로 만든 고재 대문에 '소나무집'이란 한지의 문패가 붙어 있었다. 대문 두 짝은 손님을 크게 반기는 듯 활짝 열려 있었고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들고나는 사람, 화장을 고치는 사람, 양치질하는 사람 등 소나무집 안의 풍경은 여느 화장실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눈에 띄게 다른 게 있었다. 고유명사로 된 자신의 문패를 번듯하게 달고 있는 모습이었다. 보기 드물게 멋스럽고 당당했다.  
 대개 '화장실'이라는 보통명사의 이름을 달고 존재의 의미는 무시된 채 기계적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만 봐왔다. 조금 특이한 예로는 사찰의 경우엔 해우소, 예스러움을 담고 싶은 표현으로는 뒷간, 측간 정도로 존재를 표시하고 있다. 여러 사물에는 그 특성이 담긴 다른 것과 구별되는 이름이 있는 것에 비하면 대조적이다.
 '소나무집'은 그런 통념을 깨고 고유명사로 된 자신의 문패를 달고 있었으며, 그 자체만으로도 느낌표가 가득한 공간이었다. 이처럼 번듯한 '소나무 씨의 집'에 초대받은 기분으로 들어서자니 코끝에 화장실 특유의 냄새가 아니라 솔향이 확 밀려 들어오는 듯한 심리에 사로잡혔다. 변기에 앉아서도 누군가의 탁월한 작명 솜씨에 감탄했다. 소나무 고장의 상징성과 작명가의 철학을 곱씹어보니 그 의미가 예사롭지 않다.

 많은 사람이 무심코 드나들지만 그곳은 생사의 의식이 이루어지는 신성한 장소다. 배설은 생을 위한 절대적 요식 행위다. 모든 생명체가 배설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아니 못한다면, 생존 자체에 어려움이 있다. 화장실은 그 역할의 중요성에 비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존재감이 떨어졌던 것도 사실이다. 88올림픽을 계기로 화장실 문화의 혁신이라고 일컬어질 정도의 변화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름은 다른 공간과 분류 수준인 그냥 '화장실'이었다.
 본래 작명이란 상징성과 희망, 그리고 염원을 담아 사람이나 사물과의 구별을 위해 부여하는 기호다. 사람은 물론 나무에도 곤충에게도 심지어 돌에도 그 근본을 참고로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름이란 부를 때 가장 깊은 교감이 시작되고, 그 이름에 담긴 의미도 되새기게 된다.
 작은 나의 거처를 그저 집이 아니라 '만물정'이라 부른다. 이런 이름을 붙이게 된 까닭은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이 쉬어가거나 머물 수 있는 공간이기를 바라서이다. 바람과 달도 머물다 가기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울과 담을 두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만물정'이라고 말할 때 '우리 집'이란 표현과 상당히 다른 의식이 작동함을 경험한다. 이름이 주는 이미지가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소나무집'이라는 문패를 봤을 때는 화장실과는 전혀 다른 사고 활동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배설이나 냄새보다는 소나무 숲과 솔향, 바람 소리, 늦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솔가리가 연상되었다. 화장실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 것이다. 화장실의 이름이 이토록 자연 친화적이며 참신한 서사가 연상된 일은 처음이다. 식당 이름 못지않게 고객의 마무리 공간의 중요성에 사업주의 철학을 담은 듯해 더욱 감명을 받았다.
 잠시 가을 여행을 떠났다가 인연이 된 보물 같은 의외성은 이미 탄생한 것들의 겉모습에 습관적으로 반응하는 보수적인 나의 사고방식에 균열을 주었다. 내가 본 화장실의 이름 중에 가장 향기롭고 맑은 이름이다. 어느 사찰에서 처음으로 '해우소'란 문구를 발견하고 냄새가 진동하는 공간에 앉아 풀어놓을 근심이 무엇인가를 생각한 적이 있다. 그때 가장 가까이 있는 근심은 진행 중인 배설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웃음이 툭 터진 기억이 있다.    
 '소나무집'은 해우소보다 한층 진화한 이름이 아닌가 싶다. 배설이라는 마무리 속에 내재하는 끝과 시작, 생멸의 의식儀式이 현대인의 열린 의식意識과 만나 자연스럽게 하나의 새로운 문화로 이어지는 시작점 중의 하나인 듯싶다.
 인간은 문화의 원천인 미적 매력에 매우 능동적인 생명체다. 영월 단종로 앞의 '소나무집'의 의외성에 매료된 나는 이름을 얻지 못한 전국의 화장실에 이름표를 달아준다면? 하는 흥미로운 상상을 한다. 어쩌면 반딧불이나 긴다리소똥구리라는 화장실 문패가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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