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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향 시인
심수향 시인

어느새 12월 중순이다. 한 매체에서 올 겨울은 따뜻할 것이란 예보가 있었다. 그 예보에 뭘 기대했던 건지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은 겨울이 겨울답게 추운 것이 오히려 좋다.


 아침나절 거실을 어슬렁거리다 한 장 남은 달력에 또 눈길이 닿았다. 올해 따라 이 마지막 한 장이 유난히 을씨년스럽게 보인다. 살림살이가 다른 해보다 유독 살아내기 벅찼던 한 해라 그런가 싶다. 밖으로는 지속되는 코로나 19와 국내외 심각한 경제 불안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 어느 하나 녹록한 것이 없었던 한해였다. 안으로는 식구들 건강과 진로가 기대만큼 편하지 않았던 해였다. 우리만 힘든 것이 아니라 세계 모든 이들이 힘들었던 임인년 한해가 저물고 있어서 그런가보다.


 찢어낸 달력 흔적이 더 짠하게 보이는 것은 내년 달력이 이미 와 기다리고 있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낡은 달력 위에 새 달력을 얹는다하여 지난 힘든 시간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한 일 없이 떠나보낸 한 달 한 달이 아쉽고 돌아다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늘 이맘때면 별반 새롭지 않은 감상들이 낡은 달력 위에 쌓인다. 그리고 변함없이 후회와 감사와 계획 등을 나열해 보는 것이다. 욕심을 내겠다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성실하게 잘 살아보겠다는 다짐 같은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그나마 변화라면 반성이나 후회보다 감사의 비중이 커진다는 점이다.


 시월 중순에 제사가 있어 장을 보러 갔다. 지갑을 넉넉히 채워 갔는데 계산하려고 보니 지갑이 보이지 않았다. 이것저것 정신없이 보고 다니다 떨어뜨린 것이 분명했다. 왔던 길을 되짚어가면서 혹시 지갑 못 보았느냐고 물으며 다녔다. 상인들은 하나 같이 어쩌느냐고 염려의 말을 해주었다. 그 와중에도 횡설수설하는 내게 보내주는 염려의 말과 따뜻한 위로가 힘이 되는 걸 느꼈다. 어떤 이가 사무실에 가보라 권하였다. 


 혹시 나보다 지갑이 먼저 가 있을 수도 있겠구나 기대하면서 가보았으나 기대는 기대로 끝나버렸다. 지갑 속엔 신분증부터 신용카드 등 많은 등록카드와 사진이 들어 있었다. 모든 것을 새로 발급 받을 생각을 하니 아득하기만 했다. 돈은 차치하고 지갑만이라도 돌아왔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로부터 20여일 지났을까 경찰서에서 지갑 잃지 않았느냐는 전화가 왔다. 달려가 지갑을 찾고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긁힌 곳 많고 다 낡은 틀림없는 내 지갑이었다, 돈을 제외하고 모든 것은 예전 그대로였다. 사실 돈은 제외했다 했지만 1원짜리 동전 두 개가 남아 반짝 웃고 있었다. 


 그것은 한 가게에서 현금 계산 후 거슬러 받은 잔돈이다. 주인아주머니가 '이 동전 우습게 알지마라. 이것 때문에 난처한 일 겪었다'며 내 손에 꼭 쥐어준 그 동전이다. 따뜻한 그분 마음이 지갑 돌아오는데 큰 역할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했다. 요즘은 이 구릿빛 동전 두 개가 지갑지킴이가 되어 함부로 던져놓는 습관에 경각심을 일깨워준다.


 몇 번을 생각해봐도 이 작고 낡은 지갑이 길 잃지 않고 내게 돌아온 것은 기적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몇 사람의 마음이 모아져야 이 지갑 하나가 내게로 올 수 있었나 더듬어보면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진심으로 일조해주신 그분들 께 감사한 마음을 보낸다. 비록 돈은 가져갔지만 지갑을 쓰레기통이나 풀숲에 던지지 않고 우체통에 넣어준 그 사람이 감사하고, 경찰서로 배달해준 우편집배원 감사하고, 내게 전화해주고 친절하게 전달해 준 여경찰관 감사하고, 지갑지킴이 이름으로 돌아와 준 1원짜리 동전 두 개가 감사하다. 


 감사할 일은 이뿐 아니다. 고맙게 보면 고맙지 않은 것이 없고 밉게 보면 밉지 않은 것이 없다는데 정말 그런 것 같다. 마음 조금 달리 먹었는데 밖으로 향하던 불만이 자성(自省) 쪽으로, 네 탓이 내 탓으로 많이 돌아서고 있다는 걸 느낀다. 그러니 감사 쪽으로 향해 서 있는 이 마음이 거짓 아니고 참 같다.


 언제 바뀔지 알 수 없는 이것이 아직은 감사의 자세로 서 있다. 이 추운 날씨에도 생명을 붙들고 버티는 장미 몇 송이 감사하고, 색을 잃어가면서 견디어주는 쑥부쟁이 감사하다.


 그리고 종일 잠잠한 전화기 울려 안부를 물어주는 지인이 감사하고, 아침마다 좋은 말씀과 인사를 올려주는 분들 감사하고, 귀한 땀으로 지은 농산물 나눠준 분들 감사하고, 코로나를 이겨내고 툭툭 털고 일어나준 분들 감사하다. 그리고 이 한해도 잘 견뎌준 우리 가족 모두 감사하고, 위태했던 올 한해를 잘 버텨준 나도 감사하다. 두서없는 이 글 편집해주시는 분들 감사하고, 변변찮은 글 읽어주시는 분들 역시 감사하다.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지금이 많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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