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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식 수필가·울산문인협회 회원
이종식 수필가·울산문인협회 회원

솔마루길이라는 어감이 참 좋다. 막역한 친구를 만나듯이 부담감 없이 거닐어보고 싶은 느낌이 든다. 짧은 구간은 두어 번 거닐었지만, 전 구간 도전을 하기에는 몇 해를 두고 벼리어 왔다. 휴가 때는 '꼭 한번 해보리라.' 
 비록 험산 준령을 오르는 등산은 아닐지라도 줄잡아 육십여 리를 단숨에 걸어야 하는 산행이기에 요긴한 준비는 하여야 했다. 먹고 마실 간식거리, 보호장구 등 이것저것 갖추어 배낭을 울러 메니 먼길 떠나는 행려자나 다름없다. 

 일찍부터 서둘렀으나 출발지인 선암 호수 주변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뛰거나 걷거나 하면서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저마다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나도 서서히 몸을 푼 다음 오랫동안 미루었던 숙제를 하는 심정으로 대장정의 출발을 했다. 진입로에서부터 고래 형상으로 된 선간판의 안내를 뒤로하고 한 발 한 발 옮겼다. 
 사박사박 옮기는 걸음마다 지인들의 두런거림이 가미되니 덩달아 발길도 가벼웠다. 이마에 이글거리는 햇볕이 따갑긴 하지만, 그늘이 드리워진 숲속 길은 한없는 청량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걷기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하고 숨은 가빠왔다. 
 시원한 산바람이 간간이 한줄기씩 싸하게 불어와 풀어헤친 앞가슴에 스며들 땐 더 없는 쾌감이 전율처럼 느껴졌다. 

 솔마루길은 선암호수공원에서 시작하여 신선산과 울산 대공원이 있는 옥동산을 통과하여 삼호산과 남산, 그리고 십리대밭 공원까지 연결되는 장장 육십여 리의 거리다. 비록 야트막한 산이지만 외로 돌고 바로 돌고 구절양장의 모퉁이를 휘감아 돌아야 하기에 결코 만만한 코스는 아니다. 그렇지만 언제부터였는가 모르게 나는 일상에서 걷기를 주저하지 않는 편이었기에 간절한 마음은 더했다. 더욱이 그리던 자연의 품에 와락 안기어 걷는 것은 특혜를 받은 것처럼 기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유열을 느끼며 사풋사풋 걷기 시작했다. 
 쭉쭉 뻗은 수목은 터널을 이루고 그늘진 오솔길 따라 산새들의 재잘거림에 매료되어 터덜터덜 걷다 보면 요소마다 예스럽게 설치된 정자가 있다. 
 발아래 펼쳐지는 아름다운 광경과 시가지의 발전상을 한 눈으로 즐기며 땀방울을 식히기에 충분하다. 울산의 자랑은 국가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산업의 발전과 인류의 영원한 숙제인 자연환경의 보전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실천하며 마음껏 누리는 모습들을 어렴풋이나마 잠깐씩 느끼며 내가 살아가는 곳의 우월감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 본다.

 나의 건강과 취미생활을 위한 산책이지만 누구와 어떤 길을 걷느냐가 더 중요할 것이다. 고적한 산길을 걸을 때는 무리를 지어 왁자지껄하며 걷는 것 보다 두세 명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걷거나 손만 잡고 걸어도 참 좋을 것 같다. 굳이 말은 하지 않아도 충분한 교감이 흐를 수 있는 주변의 여건이 되기 때문이다. 옮기는 발걸음마다 산새가 응원하고 잘 자란 참나무와 소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숲의 향기는 정신을 맑게 한다. 이따금 가지 사이를 빠져나가는 싸한 바람이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나는 숨을 크게 들여 마시어 길게 뿜어내기를 여러 번 해본다. 폐부 깊숙이 스며든 산소는 구석구석을 돌아 그곳에 머물렀던 것을 몸 밖으로 밀어내고 차곡차곡 채워진다. 부지불식간에 빛을 잃은 세포들은 윤기를 찾고 활력 잃은 솜털도 뽀송뽀송해진다. 식물들은 쉼 없이 좋은 물질을 만들어 내어 폐로 호흡하는 인간을 위시한 모든 동물은 그것을 끊임없이 들이키고 있지만, 정작 고마움을 망각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우리는 산길을 걸으면서도 누구에게도 방해가 되지 않도록 배려를 해야 할 것이다. 자기 혼자의 만족을 위하여 음향기기를 큰소리로 듣거나 고요한 숲에서 쿵쿵거리며 뛰어다니거나 큰소리로 왁자지껄하는 것은 고즈넉한 산행을 즐기려는 사람에게도 피해를 주지만, 호젓한 시간을 즐기는 산짐승에게도 분명 해가 되리라 생각한다. 

 시야가 확 트인 넓은 길이든 두세 명이 겨우 지날 수 있는 좁은 길이든 우불꾸불한 길은 걷기에 참 좋다. 모퉁이 돌아 펼쳐질 모습이 기대되며 또 다른 유열의 시간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담스럽게 피어있는 야생화들은 눈을 맑게 하고, 청아한 산새들의 울음소리는 귀를 뜨이게 하여 마침내 영혼까지 닿게 하는 것 같다. 이렇듯 아름다운 길이지만 숲속의 조붓한 오솔길은 왕래가 잦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해 없어져 버릴지도 모른다. 연중 한두 번씩 찾아가는 조상 산소의 성묫길처럼 잡목이 우거지고 가시넝쿨이 뻗어나기 시작하면 금방 길을 침범하여 흔적이 없어져 버린다. 길이 없으면 왕래도 없다. 그것이 인생사와도 흡사하다. 친구 간이든, 이웃 간이든, 조직에서든, 가족 간에서든 서로 간에 마음의 길을 틔워 교감을 해야 한다. 나의 마음에 그를 끌어들이고 그의 마음속에서 내가 한자리할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을 교류해야 한다. 진실은 마음에서 우러나오지만, 그 정직한 표현은 눈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음과 마음으로 이어진 길에는 잡초가 자라지 못한다. 가시넝쿨이 뻗어나지 못한다. 신뢰라는 아주 강력한 무공해 제초제가 항상 정리하기 때문이다. 

 어림잡아 댓 시간쯤 사색에 잠겨 산길을 허위허위 거닐었나 보다. 어느새 삼호산을 거쳐 남산을 빠져나와 고개를 들어 보니 문명의 이기들이 경적을 울리며 가로 내지르는 그 너머로 태화강이 넘실대며 흘러내리고 십리대밭 공원이 눈앞에 펼쳐있다. 비늘 같은 윤슬은 잔바람에도 부드럽게 빛나고 덕지덕지 얼룩진 땀방울은 강바람이 시원하게 씻어 준다. 유유히 흐르는 수면에는 물고기가 연거푸 튕겨 올랐다 동심원을 남기고 사라져 버리고 제방 위로는 저마다의 모습으로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의 풍경이 한층 조화로워 보인다. 바람이 일렁일 때마다 물비린내가 몰려오고 청청한 대나무 잎들의 서걱거림은 나의 귀를 깨끗이 씻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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