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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얼산 정상표지석. 뒤로 고헌산이 보인다.
밝얼산 정상표지석. 뒤로 고헌산이 보인다.

밝얼산은 영남알프스의 지붕이라 불리는 배내봉(背內峰)이 동쪽으로 허리를 틀어 언양 부로산(봉수대)까지 이어지는 긴 등(능선길)으로 한자로는 박월산(朴月山)이 된다. 옛날 길조차 제대로 없던 시절, 차마고도와 같았던 긴 능선길을 넘나들었던 배내골 사람들과 밀양과 원동에서 물목을 거두어들인 장꾼과 보부상, 소 떼를 모는 소 장수들이 언양 오일장으로 넘나들어야 했던 고생길과 같은 곳이었다. 이 긴 능선길은 상북 거리오담(간창, 거리 하동, 지곡, 대문동, 방갓)마을과도 이어지는데 마치 말안장처럼 생겨 말 무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이 길을 갔다 온 소와 말은 조선 팔도 어디를 가더라도 일을 잘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세고, 온순하여 우시장에서도 값을 더 받을 수가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밝얼산 아래에는 못다 한 사랑을 그리다가 바위가 된 '정아정도령바위'와 세 번 소 울음소리를 내고 오게 하여 상피(相避·가까운 친인척 사이의 남녀가 성적 관계를 맺는 일)를 거부했던 소목골과 동뫼산(일명 밀양산·密陽山)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정아정도령바위.왼쪽 큰바위가 정도령 바위이고, 작은바위가 정아바위이다.
정아정도령바위.왼쪽 큰바위가 정도령 바위이고, 작은바위가 정아바위이다.

 

# 정아정도령바위 
온통 산이고 뭇 봉우리가 뒤를 막으며 좌우를 빙 둘러앉아 있는 배내라는 마을이 있었다. 마을 사이에 두고 넓고 긴 계곡물이 흘러가고, 어릴 적부터 소꿉놀이하며 사이좋게 지냈던 정아와 석이라는 단짝 친구가 있었다. 둘은 마을에서 사이좋기로 소문난 짝꿍이었다. 세월은 흘러 처녀, 총각이 된 정아와 석이는 혼인하고자 했지만, 정아의 집안에서는 가난하고 병든 어머니를 모시는 석이에게 정아를 시집보내려 하지 않았다. 결국, 정아는 고개 넘어 상북 명촌에 있는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 당시 배내 아가씨들이 명촌으로 시집가려면 가마를 타고 긴등재를 넘어야 했는데, 한참을 오르던 정아네 가마 역시 정아정도령바위 앞에서 쉬어 가기로 했다. 정아정도령바위는 나란히 사이좋게 붙어 있는 한 쌍의 바위인데 정아는 바위를 보며 석이를 그리워하며, 석이 어머니의 병이 빨리 낫기를 두 손 모아 기도 했고, 다음에 태어나면 부자로 태어나기를 간절히 빌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의 명물인 산나물을 캐러 가는 동네 아낙들은 정아정도령바위를 지날 때는 제각기 무사 안녕을 빌기도 하고, 부드러운 나물을 많이 따게 해달라고 소리를 내어 “오늘 좋고 부드러운 나물 많이 따게 해주이소" 외치기도 한다. 
 그러나 양옆으로 나란히 서로 사이좋게 이웃하고 있는 정아정도령바위는 언제부터 이곳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오래전부터 이 말 무제를 오르고 내릴 때 배내골 사람들과 보부상들이 이곳에서 요기하기 위하여 초배기(도시락)을 감추어두고 언양 오일장 등 먼 길을 갔다가 다시 이 고개를 넘어가야 했기에 허기를 달래고, 잠시 쉬었다 가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이좋게 붙어 있는 바위 중 큰 바위가 정 도령 바위이고 작은 바위는 정아 바위이다.) 

후리마을 뒤편으로 이어지는 골짜기 소목골의 경관. 지금은 저수지 축조공사로 그 옛날의 전설이 잠겨 있다.
후리마을 뒤편으로 이어지는 골짜기 소목골의 경관. 지금은 저수지 축조공사로 그 옛날의 전설이 잠겨 있다.

# 소목(암)골 : 우곡(牛谷) 의 정절(貞節)          
소목골 우곡(牛谷)은 길천리 후리마을의 뒤편에 있는 골짜기이다. 옛날 이곳에 외동아들을 둔 부부가 살고 있었다. 부인은 늘 병약한 몸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외동아들이 좋은 배필을 만나 장가를 들이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세월은 흘러 아들은 장가를 들었고 새로 들어온 며느리는 절세미인으로 마을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호사다마라 하였던가! 아들이 장가를 간 지 사흘 만에 시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 아들도 장가를 간 지 석 달도 못 되어 시름시름 앓더니 죽고 말았다. 미인을 얻어 장가를 가면 단명한다는 옛말이 진실인 것처럼 졸지에 며느리는 청상과부가 된 채로 시아버지와 함께 살아야 했다. 
 세월은 흘러 어느 해 동지섣달 긴긴밤. 휘영청 밝은 달은 후리마을을 대낮같이 밝게 비추고 있었다. 시아버지는 저녁상을 일찍 물리고 초저녁에 잠이 들어 한숨을 자고 일어나보니 달은 아직 중천에 머무르고 있고 죽은 마누라 생각이 절로 났다. 
 이날 시아버지는 눈이 뒤집혔는지 남자의 본능적 욕구를 참지 못해 며느리가 자는 방으로 살금살금 기어들어가 며느리를 겁탈하려고 달려들었다. 놀란 며느리가 뿌리치며 시아버지를 밀쳐냈으나 시아버지는 막무가내였다. 며느리는 하는 수 없이 “아버님, 제가 몸단장을 할 동안 소암골  뒷골에서 소 울음소리를 세 번 내고 오시면 청을 들어 드리겠다"하였다. 시아버지는 이제 며느리가 내 말을 들어주려한다고 생각하고 곧바로 뒷골로 가서 소 울음소리를 세 번 내고 돌아와 보니 며느리는 대들보에 목을 매 죽어 있었다. 그날 밤 시아버지는 집을 떠나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세 번 소 울음소리를 내고 오라 한데는 상피(相避)를 거부하는 매서운 결의가 담겨 있었다. 이일이 있고 난 뒤 이곳을 소암골 또는 소목골이라 불렀다. 그런데 '소'는 높은 산을 뜻하는 옛말로 볼 수 있으며 '목'은 길목이니 산으로 오르는 길목을 뜻하는 이름으로도 해석된다. 
 

밀양산이라고도 불리는 동뫼산. 뒤로 배내봉과 오두산이 에워싸고 있다.
밀양산이라고도 불리는 동뫼산. 뒤로 배내봉과 오두산이 에워싸고 있다.

# 동뫼산(일명 밀양산密陽山)
울주군 상북면 거리 하동마을 앞 들판에는 오산(吾山)이라는 아담하고 조그마한 산이 하나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산을 밀양산이라 부르고 있다. 울산에 밀양산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언양 고을에 거대한 성을 쌓기 위해 수년 동안 많은 백성이 동원되었다. 공사가 지속하다 보니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민심은 흉흉해졌다. 그뿐만 아니라 야반도주하는 일들이 벌어져 울산의 백성들만으로 공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가까이 있는 밀양 백성들까지 공사에 동원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민심은 더욱더 흉흉해졌을 뿐만 아니라 이 같은 소문은 널리 퍼졌는데 마침 밀양 고을에 살고 있던 마고 할머니가 이 소식을 듣고 축성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을 가엾게 생각하여 앞치마에 밀양에 있는 흙을 담아 밀양 고개를 넘어 이곳까지 왔다. 마고 할머니가 앞치마에 흙을 담고 오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들으니 언양 고을의 축성공사가 이미 끝나버리고 말았다고 하였다. 마고 할머니는 앞치마에 담고 온 흙을 도로 밀양으로 가져갈 수도 없고 해서 여기에 내려놓고 가버렸다고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때부터 이산을 가르쳐 밀양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이산에 묘를 들이면 이상 한 일이 생겨
그런데 웬일인지 이 밀양산에 묘를 들이기만 하면 마을에서 큰 해가 일어났다. 날이 가물어서 흉년이 들거나 돌림병이 들어와 사람이 죽거나 화재가 일어나서 피해를 보거나 가축들이 몰사하는 등의 일들이 일어났다. 
 그런데 풍수지리설에 능한 사람이 이 산이 대명산이라고 하여 여기에 묘를 들이면 마을에는 피해가 있더라도 묘를 들린 자손들은 크게 부귀영화를 누릴 수가 있다고 했다. 이후 이 마을 사람이 아닌 다른 마을 사람들이 선친의 묘를 파서 몰래 암장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봉분 없이 평장으로 위장하였다. 그러나 이장 이후 마을에는 큰 화가 일어났고 마을 사람들은 또 누가 묘를 쓴 것이라 믿었다. 마을 사람들은 밀양산으로 올라가 암장한 묘를 찾아내어 시신을 멀리 갖다 버렸다. 신기한 것은 암장한 묘를 파내 버리기만 하면 다음부터는 마을이 편안하게 되었으니 사람들은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은 밀양산은 금장지(禁葬地)로 정하고 묘를 쓰지도 않고, 외지인이 쓰지 못하게 감시를 했다. 
 
# 밀양 부사께 세금을 내고 묘를 들이다
그런데 한번은 상북면 지화리에 사는 동래 정씨 문중이 여기에 묘를 쓰려고 하자 마을 사람들이 들고일어나서 막으려 했다. 그랬더니 “이산이 본래 밀양산이기 때문에 우리는 밀양 부사에게 세금을 내고 장지 허가를 받아 왔습니다"며 밀양 부사가 발행한 장지 허가서를 내놓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주민들도 막을 수가 없었다. 동래 정씨 문중은 여기에 묘를 쓴 후 재산도 일어나고 인재도 배출했다. 주민들은 또 큰 화가 미치리라고 염려했으나 다행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전에 묘를 쓴 사람들은 산주에게 산세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마고 할머니의 노여움을 입어서 그러한 화를 미치게 했으나 이번에는 정당한 산세를 내고 장지 허가까지 받았기 때문에 마고 할머니가 노여워하지 않았다고 믿었다고 한다. 
 이처럼 영남알프스 지붕이라 불리는 배내봉(천화현) 언저리를 넘나들었던 옛사람들의 이야기가 지금도 상북, 언양 사람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이야기는 필자가 울주군 상북면 후리 마을에 살고 계신 김한주(80) 어르신으로부터 채록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참고자료 : 울산유사(蔚山遺事)-김석보著

 

진희영 산악인
진희영 산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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