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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길 수필가
이명길 수필가

휘영청 보름달이 창으로 기웃댄다. 별마저 밤하늘에 꽃눈개비처럼 흐드러졌다. 밤은 어느새 이슥한 고요에 들고 이제 나만의 공간만 오롯이 환하다. 사색의 시간에 들거나 음악을 들을 때, 마음을 재우고 싶을 때는 다락방에 머문다. 서툰 하모니카를 불거나 낙서 같은 그림을 그리기에도 이만한 공간이 없다. 무엇보다 책을 읽거나 컴퓨터를 열어 딴 세상을 기웃대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러다 보니 나만의 세계에 빠져들어 다락방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내 안에 어둠을 키우기 시작할 즈음, 터울이 많은 오빠가 입대했다. 집안이 온통 축축해져 내 슬픔의 안테나 따윈 무시되었다. 속 그늘을 한껏 키우던 그때, 가난을 이겨내야 했던 엄마의 뚝심으로 살던 남의 집 안채를 비워 주고 다락이 있는 단칸방으로 옮겼다. 벽에 납작하게 붙은 나무 문을 당기면 계단이 너덧 개 있었는데 거길 오르면 기어 다닐 정도로 천장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래도 가져 보지 못한 다락방 덕분에 그 집을 안온하게 받아들였다.
 
다락방에는 둘만 누워도 꽉 찼다. 좁아도 아늑한 맛이 있어 학교에서 돌아오면 그곳에 머물렀다. 낮에는 텅 빈 집이 오히려 답답하여 마당 쪽으로 하나 있는 코딱지만 한 창이 숨통 같았다. 가끔 아랫집 꽃밭을 내려다보면서 꽃 향이나 부르려 코를 드밀면 늙은 아주머니가 소리꾼처럼 신세 푸념을 내질렀다. 한바탕 눈물을 질펀하게 쏟고서야 막을 내리는데 그럴 때는 꽃 향도 잊은 채 꼼짝없이 엎드려 지켜보곤 했다.
 
밤하늘이 까맣게 내려앉으면 언니와 다락방에서 라디오를 들었다. 연속극 로맨스가 귀를 후비고 가슴을 적시면 심장이 쫄깃해졌다. 
 
특히 '별이 빛나는 밤에'는 단골 메뉴인지라 낯선 팝송에 젖어 언니가 적어주는 콩글리시를 외웠다. 또래보다 일찍이 'El condor pasa'를 흥얼거리고 폴 모리아 악단을 기억하게 된 것도 그 덕분이었다. 그곳에서 부자가 되어 단칸방을 벗어나는 꿈을 자주 꾸었으나 다락방을 버리고 싶진 않았다.
 
두 번 더 이사하여 나는 직장인이 되었고 언니가 결혼했다. 내 방이 생기자 그때의 다락방을 잊었다. 나만의 공간, 비밀로 둘 것이 하나 없는데 자물쇠를 채워둔 곳간처럼 듬직했다. 친구가 오면 문을 닫고 깔깔댈 수 있고 밤늦게 불을 켜둬도 곁사람 눈이 시릴 염려조차 안 해도 되었다. 무엇을 하든 나로 사는 것 같았다.
 
결혼 후, 둘째를 출산하면서 퇴직했다. 살림조차 어설픈데 혼자 아이 둘을 보살피는 일이 벅찼다. 엄마, 주부, 아내로 시간을 쪼개다 보니 '나'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큰애가 유치원에 가면 나만의 시간을 가지리라 위안했으나 내 등이 필요한 둘째가 걸렸다. 그제야 시나브로 다락방이 그리워졌다.
 
늘그막에 시골 볕 맑은 곳에 정착하면서 지붕 모퉁이에 다락방을 마련했다. 이 나이에 숨을 곳이냐고 하겠지만 내게는 빼놓을 수 없는 꿈이었다. 이쪽저쪽 창을 내고 천장과 벽에 단열재를 붙이고 냉난방기도 갖췄다. 볼품이 부족하지만 서재로 만들었다. 내가 붓방아만 찧는다고 모집을 사람도 가탈 부릴 사람도 없는, 오로지 혼자 숨 쉬는 쉼터이다.
 
어린아이는 식탁 아래나 구석진 곳을 자주 찾는다. 작은 텐트나 종이상자 안에서 놀기를 좋아하는 것도 자기만의 공간이 주는 안정감 때문일 거다. 나도 자궁 속에서 웅크린 채 자란 태아 적 기억을 갖고 있는지 다락방이 그런 역할을 한다. 내 성장기의 외로움을 재우고 낯선 꿈에 젖었던 곳, 쓰지 않는 물건처럼 쑤셔둔 가난의 무늬가 비록 남은 곳일지라도.
 
다락방 창으로 내다보면 무성한 초록 사이 담상담상 집들이 앉았다. 다남길로 경운기가 새벽을 열고, 감나무 아래 깨밭에 놀던 참새 무리가 포롱 거리며 나르샤 한다. 시야에 드는 이미지가 청각으로 스미면 이것들이 함께 하여 내 상상의 가지는 하늘땅 어디든 뻗는다.
 
책상에 앉아 발코니 쪽 창을 내다본다. 어둠 속으로 멀리 보이는 고속도로에 자동차의 불빛이 간간이 붉은 선을 긋는다. 어느새 하늘에 뭇별이 지고 샛별 하나 빛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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