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울산 앞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망해사 절터와 동서 쌍탑인 승탑.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신라 헌강왕이 울산에 나들이를 나왔다가 갑자기 구름과 안개를 만나 한 치 앞도 보이질 않으니 한 신하가 동해용의 조화로 일어난 일이라 말한다. 
 
이에 왕이 용을 위해 절을 지으라 왕명을 내리자 신기한 듯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 삼국유사 처용랑망해사조에 남겨진 기록이다. 
 
이때 지어진 사찰이 울주군 청량읍 율리 망해사이다. 당대에는 신방사(新房寺)라 불렸다고 한다.  

망해사 입구.
망해사 입구.

망해사 절터를 찾아서 율리버스공영차고지의 철망울타리 옆길에 들어섰다. 좁다란 산길을 한참 걷다 보니 영축산(영취산)자락 동쪽 기슭 아래 망해사를 만나게 된다. 

망해사는 조선 말기 철종때 간행된 대동여지도에 표기 돼 있으나 그 이후 문헌 기록에 더이상 드러나지 않아 폐사돼 사라진 것으로 보여지며 지금 사찰은 1950년대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대웅전 법당 오른쪽으로 꺾어 산자락으로 30여 m 정도 더 오르면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석축 위에 팔각형 둥근 모양의 돌탑 2기가 보인다. 
 

동·서 쌍탑으로 세워진 망해사지 승탑.
동·서 쌍탑으로 세워진 망해사지 승탑.

석남사 승탑(부도)과 유사한 팔각원당형 양식이지만 망해사지 승탑은 동·서 2기의 쌍탑이며 역시 보물로 지정돼있다. 
 
승탑은 이름난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봉한 묘탑(墓塔)인데 망해사지 승탑은 가까이 다가서 보면 높이 3m가 넘는 제법 웅장한 모습이다. 
 
헌강왕은 당나귀 임금으로 널리 알려진 경문왕의 3남매 중 맏아들이다. 그가 지었다는 망해사는  사라지고 현재 사리탑 2기만이 남아 있다. 
 
부친 경문왕은 장인 헌안왕에게 어렵게 왕권을 물려받은 반면 아들 헌강왕은 맏아들로 태어나 15살 어린 나이에 왕좌에 올랐다. 
 
신라의 태평성대를 누리며 사냥을 즐겼고 유난히 춤과 인연이 깊은 인물이다. 경주 포석정에서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홀로 춤을 즐겨 포석정을 신라 왕실 연회장으로 각인시킨 당사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학계 일부에선 왕실의 제례 공간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영축산자락 아래 신라 헌강왕의 왕명에 의해 지어진 망해사의 절터와 승탑.
울주군 청량면 영축산자락 아래 신라 헌강왕의 왕명에 의해 지어진 망해사의 절터와 승탑.

신라 말기 겉으로 풍요롭고 평화로웠지만 쇠잔해지는 중앙집권을 틈타 고구려와 백제의 땅에서 고토 회복 움직임이 꿈틀대고 수도 서라벌 인근 지방호족들도 덩달아 세력을 키우던 시기였다. 변방인 울산 바닷가 포구에 왕이 왜 나들이 왔는지 설만 무성하다. 
 
통일신라시대 양식인 쌍탑 사이 뒤편 무성한 숲이 있는 자리는 금당터로 남쪽 바닷길과 울산항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이다. 1960년 흩어져 있던 석재를 모아 복원한 승탑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됐다. 동탑 지붕돌은 귀퉁이가 일부 떨어져 나간 상태이고 일제시대 도굴을 당하면서 심하게 훼손된 것으로 보고 있다.
 
망해사지 승탑 탑신부의 팔각 몸돌 4면에는 사각 문짝 모양(문비 門扉)을 새겨 그 안에 사리가 보관됐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붕돌 위에 있어야할 상륜부는 사라지고 없으나 일부 파손된 부재가 별도로 보관돼 있다고 한다. 
 
기단부 윗받침돌의 연꽃은 2단으로 새겨 화사하게 꾸몄다. 지붕돌 처마 끝에는 풍경 장식을 매단 흔적이 엿보이는 둥근 구멍 6곳이 있다.
 
조선 후기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울산 읍지에 '절 옆에 망해대가 있어 선비들이 그곳에 올라 바다를 보며 한시를 읊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 말 울산을 오게 된 문장가 설곡 정포가 늦여름 이른 아침 이곳을 찾아 '울주팔영(蔚州八景)'중 하나인 한시 '망해대(望海臺)'를 남겼으나 절터 인근 어디를 살펴도 유사한 너럭바위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망해대 (望海臺)


정포(鄭浦)

 
끊어진 벽은 개인 하늘을 업신여기고 높은 누대는 큰 바다를 잡아 당기네

멀리 보니 물 빛은 하늘과 접해서 백리에 푸르고 푸르네

돌집에는 가을이 먼저 옴을 알겠고 소나무 문짝은 새벽됨을 알려주네

한가한 사람 손님을 불러 동방을 바라보니 붉은해 부상에 올라오네

 

그는 왕의 그릇된 정치를 상소하다 지방관으로 울산에 좌천됐다. 원나라 간섭과 왕의 폭정 등 시대를 탓하지 않은 정포는 울산뿐만 아니라 부산 동백섬까지 둘러보며 빼어난 절경을 시로 읊어 문집 '설곡집'에 남겼다. 울주팔영 덕택에 흔적조차 없는 옛 명소를 가늠할 수 있는 소중한 유산이 됐다. 
 
망해사를 빠져나오는 길은 율리버스공영차고지 옆길이 아닌 상보마을 두현저수지를 거쳐 울산구치소로 이르는 길을 택했다. 
 
절 인근에는 대형교회 신축공사가 한창이고 전원주택 등 드물게 민가도 보인다. 저수지에 다다르면 칼국수와 민물매운탕 식당이 몇 있고 외황강 물길이 시작되는 울산구치소에 이르면 도로변에 오래된 오리탕 맛집들이 늘어서 있다. 오리탕에 정초 추위를 너끈히 달래본다.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