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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쩜 누구나 비자금이 있지 않을까. 액수의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을 지라도 그 비자금으로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생색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비자금은 혼자 즐기는 위안이 될지도 모른다. 

 새해를 맞고 이런 저런 새해 인사를 나누는 1월은 열두달을 품은 비자금 같기도 하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은 자신만의 일년을 어떻게 쓸 것인지 계획하고 기대하기도 하니까. 

 그래서 만원의 비자금으로 '든든한 신주 단지로 생각하는' 시인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만원의 비자금을 가진 시인의 행복한 마음이 훤히 보여 자꾸만 시속에 따뜻함이 꼭꼭 숨어 있는 것 같아 덩달아 즐거운 마음이다.

 비자금 만원
 최영철 작
 
 오래전 선물 받은 명품 지갑
 한 번도 사람들 앞에 자랑스럽게 내보이지 못하고
 의기양양 계산대로 나아가보지도 못하고
 책상서랍에서 죽을 쑤고 있는 것인데
 빈 지갑째로 두면 오던 복도 달아난다기에 넣어둔 만원 한 장
 나는 그것을 내 생의 비자금이라고 위로하는 것인데
 머리 다쳐 수술 받을 때 아내 야간 응급실 갔을 때
 아이들 등록금 모자랄 때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한 번도 버젓이 꺼내 써보지 못했으나
 나는 그것을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든든한 비자금이라 생각하는 것인데
 기껏해야 밀린 신문 값 낼 때 담배 살 때
 느닷없이 찾아온 동무에게 막걸리 한 잔 대접해 보낼 때
 출출하고 머쓱한 날 라면이라도 끓여 먹어야할 때
 슬그머니 꺼냈다가 다시 채워두는 것인데
 큰일은 막지 못해도 생의 다급한 순간 수도 없이 막아준
 그 비상금 만원에 나는 감사하는 것인데
 어느 재벌이 꼬불쳐 둔 수조원이 부럽지 않은
 나는 그것을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생의 든든한 신주 단지로 생각하는 것인데
 꺼내고 또 채워 넣을 때마다 누구 보는 이 없는지
 한 번 더 주위를 둘러보고 또 둘러보는 것인데
 
 선물 받은 명품 지갑 속에 넣어둔 만원의 비자금, 오던 복도 달아난다해 넣어두었다는 시의 초반이 재미있다. 짠한 것 같은데 시인의 긍정적인 사고는 시의 전반을 슬프지 않게 하는 기술처럼 이끌어 간다. 그래서 집안에 꼭 필요할 때 그 비자금을 내 보이지도 못했지만 시인에게는 위로가 되어 준 만원의 비자금. 살면서 믿을 구석이 있다는 것은 늘 마음을 풍족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어느 재벌이 꼬불쳐 둔 수조원이 부럽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도순태 시인
도순태 시인

 생각이라는 것이 이렇게 고무줄처럼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더 많은 긍정의 힘을 늘리게 하기도 한다. 꽉 채우지 않아도 풍족할 수 있는 인생의 여유일 지도.

 하지만 만원의 비자금이라 함은 어쩐지 씁쓰레하다. 과연 만원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시인은 정말 필요할 때 마다 그 만원의 값어치를 잘 활용하는 듯하다. '큰일은 막지 못해도 생의 다급한 순간 수도 없이 막아준/ 그 비상금 만원에 나는 감사하는 것인데'로 보아 시인의 욕심 없는 삶이 더 크게 보이기도 하다. 

 아무도 만원의 비상금을 탐내지 않을 진데 시인은 '한 번 더 주위를 둘러보고 또 둘러보는' 아이의 행동 같은 표현으로 비상금을 더 절실하게 표현함으로 시의 본래의 목적을 달성한 것 같다. 몰래 모은 비밀 자금이니까 말이다. 정월에서 시작하는 각자의 비자금은 무엇이면 좋을까. 자신만의 귀한 것이 비자금이 되는.
 
※최영철 시인은 경남 창녕 출생으로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했다. 2011년 제 4회 이형기 문학상과 2010년 제 10회 최계락 문학상과 2000년 제 2회 백석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시집으로는 멸종 미안족 외 다수와 산문집 시로부터 외 다수 등 총 24건의 작품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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