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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훈 수필가
오병훈 수필가

동백나무는 찬바람이 불 때 비로소 꽃망울이 벙근다. 다른 대부분의 꽃들이 시들고 잎마저 말라죽고 나면 동백은 오히려 푸른 잎을 반짝인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다소곳이 고개 숙인 동백꽃의 그 붉은 색깔은 겨울에 피기에 더욱 가치가 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바닷가에서 누구를 기다리는 듯한 그리움의 꽃이다.


 동백은 생각만 해도 멍든 가슴을 아리게 하는 꽃. 시들어 떨어지는 꽃이라면 조금 아쉬울 뿐이거늘 동백은 꽃다운 나이에 자신을 송두리째 버리는 순교자 같은 꽃이 아닌가. 실바람 한 오라기 없는 어느 겨울 새벽, 하얀 눈 위에 순결이 흘린 선혈을 보았는가.


 어느 해였던가. 제주의 시커먼 현무암에서 가진자의 속박에서 벗어나 잘 살아보겠다고 목이 터져라 외쳤던 그들의 피를 보았다. 뚝뚝 떨어진 붉은 아우성이 바위에 생채기를 남기 듯 말라가고 있었다. 가장 총명한 이성으로 절정기를 미련 없이 버리는 희생정신이여. 늙고 병들어 돌아서는 꽃이 아니기에 더욱 안타까운 꽃. 동백은 자신의 지친 뒷모습을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 날 선 바닷바람에 당당히 맞서는 청춘의 꽃이며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선구자이다.


 가난한 갯마을 사람들의 정겨운 벗인가. 동백꽃 소식을 들으면 잊고 있던 고향의 벗을 생각하게 되는 추억의 꽃인 동시에 가난한 보릿고개를 떠올리는 서러운 꽃이다. 냉기가 더할수록 앙다문 가슴에서는 뜨거운 기운이 솟구쳐 황금빛 팡파르를 울린다.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다소곳이 고개 숙인 모습은 면사포를 쓴 수줍은 신부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바닷가 오두막집. 가난한 어부의 외동딸이 좋아했던 꽃이기에 언제나 위태로운 절벽에서 향기로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린다.


 동백은 갯마을 사람들의 생활이요 민속이며 문화다. 옛날에는 종이로 조화를 만들어 의식에 널리 썼다. 고려 때부터 불교의식이나 민속신앙 의식에서 지화(紙花)를 쓰게 되면서 일반 가정에서도 지화를 장식하는 일이 유행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때 만든 종이꽃을 보면 모란, 국화, 연꽃을 많이 만들었고 매화와 동백, 무궁화, 진달래도 불단이나 제단을 장식하는 데 썼다. 동백은 꽃이 크고 색깔이 선명하여 지화를 만들었을 때 다른 꽃보다 사실감이 있고 만들기도 쉬웠다.

 

삽화. ⓒ왕생이
삽화. ⓒ왕생이

 중국 진나라의 시황제가 늙지 않고 죽지 않는다는 불로초와 불사약을 구하기 위해 동해로 사람을 보냈다는 전설이 있다. 그 사신이 우리나라의 제주도에 와서 가져간 불사약이 바로 동백기름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일본 교토의 쓰바키지(椿寺)에는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우리나라 울산성에서 훔쳐 그들의 괴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바친 오색동백(五色椿)이 아직도 살아있다. 히데요시는 이 나무에 감시자를 두어 아무도 근접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젊어지기 위해 씨에서 짠 기름을 혼자만 먹었다고 한다.


 옛날부터 우리나라의 동백꽃은 멀리 중국에도 잘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이백의 시에도 '해홍화는 신라국에서 자라는데 꽃이 매우 선명하다'고 했다. 
 또 '유서찬요'에는 '신라국의 해홍화는 곧 산다를 말한다. 12월부터 꽃이 피기 시작하면 이듬해 2월 매화가 필 때까지 계속되기 때문에 다매(茶梅)라고도 한다'고 했다.


 동백은 인고의 세월을 이겨낸 영광의 상징으로 보고 수많은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사철 푸른 잎을 하고 있어 불사(不死)의 대상으로 보았다. 남해 도서지방에서는 새로 담은 장독에 새끼줄을 걸고 소나무 가지와 동백 가지를 꽂는다. 잡귀와 역질이 들지 않기를 바라는 뜻이다. 


 꽃은 통째로 떨어진다. 시들지 않은 꽃이 떨어지는 식물은 동백 말고는 별로 없을 것이다. 떨어진 꽃을 주워 술을 담가 마시거나 찻잔에다 띄울 수 있다. 또 꽃잎을 찹쌀 반죽에 적셔 전을 부치면 맛깔스런 요리가 된다. 꽃을 쪄서 말린 것을 빻아 가루로 만들면 지혈제로 효과가 좋다. 외상에 뿌리거나 코피 날 때도 쓴다. 


 동백기름은 튀김 요리를 할 때 좋고, 머릿기름으로 했던 화장유였다. 목욕 후에는 동백기름을 발라 피부를 매끄럽게 했다. 비누가 없었던 시절에는 잎을 태운 재를 물에 녹여 비누 대신 썼다. 동백기름은 기계의 윤활유로 쓰였고, 등불을 밝혔으며, 불에 데었을 때 상처난 곳에 발랐다.


 일본에 뿌리 내린 울산의 동백을 되찾아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최소한 가지를 잘라서 꺾꽂이를 하거나 종자라도 가져와 원산지인 울산에 복원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무도 하나의 생명문화재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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