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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에 잠긴 반구대 암각화. 오늘의 목적지였지만 수면아래 신음하는 고래의 이야기들은 망원경으로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엄숙한 반성을 불러온다.

 

태화강은 울산이다.
울산의 과거와 현재가 태화강에 있고
내일의 울산이 그 물길로 흐른다.
본지는 지령 1000호와 2010년을 맞아
'태화강 백리, 그 시작부터 동해까지'를
연중기획으로 연재한다.
태화강의 출발부터
동해에 이르는 100리 길을
한발한발 걸으며
그 100리 길에 깃든
어제의 이야기와
오늘의 울산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이시간과 내일의 이야기를
이번 기획을 통해 엮어낼 예정이다. 

 

   석가산 돌아 반구대 가는 길위로 또다른 길들의 속살이 열린다. 바람과 햇살, 숲과 새들을 껴안는 걸음은 만남을 선사하고, 집청전 지나 반구서원을 스치면 직립암벽의 그늘이 압권이다. 고래를 만나러 가는 길은 이렇게 멋스럽다.

 

 #선사를 찾아가는 길


 

 길은 핏줄이다. 이 땅의 산하에 사람이 살면서 그 자취는 길을 만들었다. 길과 길이 연하여 소통이 있었고 그 소통의 결과가 역사다. 무수한 길은 혈맥을 움직이고 그 움직임의 진동이 숱한 이야기를 만들었다. 7000년전, 우리가 살고 있는 울산의 땅도 그렇게 시작됐다. 수백만년의 인류사를 유추해 보면 이 땅의 역사는 북방이 시원이다. 그래서 선사인이 만든 이 땅의 첫 길은 북으로 향한다. 그 출발에 그들의 발원이 새겨 있고, 그 발원의 간절함이 물길에 닿아 바다로 향한다. 바로 태화강 100리, 유유한 우리의 물길이다.
 세상이 열리는 시간, 신새벽 초연한 빛을 심호흡하며 대곡박물관을 나섰다. 벌써부터 주차장엔 이 땅과 함께 호흡하려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눈에 띤다. 등산화 끈을 질끈 조이고 향한 석가산 초입은 이제 완연한 아침이다.


 능선이 싸늘하다. 여린 빛이 차오르는 동쪽 능선엔 함성처럼 나목들이 팔을 뻗는다. 쨍하는 매서운 바람이 대곡댐 육중한 콘크리트를 사선으로 감아쥐고 온몸으로 덮친다. 이상한 일이다. 그 차디찬 바람에 온몸이 얼어붙을 만도 한데 순식간에 지나간 바람의 자취가 궁금해진다. 문득, 석가산 돌아 반구대 가는 길이 조명처럼 훤해지고 길 위로 또 길이 속살을 드러낸다. 그 길에서 잠깐 숨을 멈추고 심장의 저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두근거림을 즐거이 느껴본다. 선사인의 숨결, 이 땅의 역사라는 무거운 담론을 배낭에 지고 길을 나섰지만 몇 발 디디지 않아 배낭 속 담론들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풀어야 하나. 머뭇거리는 순간, 밤톨 같은 다람쥐 한 마리가 숲 저쪽에서 나를 엿본다. 그래, 길은 만남이다. 길을 걸으면 바람과 햇살, 숲과 풀, 이름 모를 새와 짐승을 만난다. 어디 그뿐인가. 비슷한 영혼을 가진 이들과 길동무로 만나고 쉬어가는 정자나 마을에서는 다른 듯 비슷한 삶의 이야기와 사람을 만난다.
 석가산 능선은 아쉽다. 첫 만남의 설렘이 머뭇거리는 순간, 암각화전시관을 향하는 신작로가 세련된 모습으로 장면을 바꿔버린다. 아쉬움은 한 순간, 그래도 다시 찾고 싶은 마음을 풀 섶에 묻어두고 질겅 다짐으로 끈을 묶을 수 있어 좋다. 아스팔트 따라 멋스럽게 걷기 시작하면 석가산 중턱에 풀어놓은 선사의 담론이 어느새 배낭 속으로 찾아든다. 그래, 7,000년을 순간이동하는 매력도 이 길이 아니면 체험할 수 없는 경험이다.       
 
 #아! 반구대

 


 고래를 만나러 가는 길은 멋스럽다. 대곡천이 흐르는 굽이를 돌아 휘감기듯 빽빽한 직립암석의 그늘이 우선 압권이다. 풍경이 시야를 가리면 푸름을 모아 정자에 올려놓은 집청전이 기다린다. 경주최씨 가문의 문중정각인 이곳은 고래를 만나기전 한번은 배낭을 풀고 걸터앉아 볼만한 곳이다. 맑은 기운을 모아 깊은 숨을 들이마시는 집청전(集淸殿)에 앉으면 맞은 편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자세히 살펴보면, 두 마리의 학과 학소대(鶴巢臺)라는 글자를 발견할 수 있다. 두 마리의 학은 양각으로 학소대는 음각으로 차분하다. 오른편의 학은 고개를 들고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고, 왼편의 학은 한 다리로 서서 부리로 깃을 고르는 듯한 자세인데 놀랍게도 그 각인된 조각이 눈을 뜨면 현실로 나타나는 우연을 만날 수도 있는 곳이 바로 이 곳이다.


 집청전에서 숨을 고르고 한발, 반구서원이 쇠사슬에 잠긴 채 서 있다. 반구서원. 쇠붙이로 채워놓은 이곳은 포은 정몽주, 이언적, 정구 등 세분 선생의 높고 곧은 뜻을 이어받기 위해 조선 숙종 때 이 곳 유생들이 세웠으나 곧 불타 없어졌다 중건되고 다시 현대에 와 지난 1967년 사연댐 건설로 현재의 위치에 섰다. 이곳은 포은이 언양현 어음리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자주 찾았고 문원공 이언적, 문목공 정구 선생도 두루 돌아다니면서 승경을 즐기던 자리이기도 하다.
 반구서원의 흙담을 돌아 반대방향으로 몸을 틀면 비로소 바다냄새가 난다. 반구대다. 우라질 사람들의 육시랄 같은 논쟁으로 부서지고 짖물려 망신창이가 된 고래 몇 마리가 수면 아래서 자맥질 한다.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그 수면 아래 새끼 밴 범고래가 끼이룩 거리는 신음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반구대암석에 새겨진 그림은 이 땅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를 알리는 증거다. 북방에 뿌리를 둔 선사인은 이 땅에서 수렵을 시작했고 이를 통해 삶의 질을 높여갔다. 보다 나은 먹을거리와 보다 많은 종족에의 염원을 바위에 새기고 제단을 차려 주술발복을 노래했다.  
 총 75종 200여점의 그림이 남아 있는 반구대암각화는 무엇보다 고래가 주인공이다. 작살 맞은 고래부터 새끼를 배거나 데리고 다니는 고래, 배를 타고 고래를 잡는 어부 등의 모습이 영락없는 고래천국을 연상케 한다. 반구대암각화를 통해 유추해 보면 선사시대 울산은 그야말로 고래마을이었다. 반구대 인근의 넓은 평지는 고래잡이 배들이 정박한 고래항구였고 그 상부 평원과 산지는 풍성한 먹을거리를 자산으로 풍요로운 문화를 향유하는 부족이 살아가는 터전이었다. 이들은 참고래부터 귀신고래까지 단체수렵을 통해 사냥을 해 뼈는 화살촉과 사냥기구의 재료로 사용하고 기름은 불로, 고기는 양식으로 활용했다. 


 바로 이 같은 이 땅의 흔적이 사라질 위기에 있다. 퇴적암의 특성상 반구대암각화는 물과 상극이다. 퇴적암이 물을 만나면 자연상태의 퇴적암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훼손이 급격하게 진행된다. 현재 상태가 풍화퇴적 4.5단계라니 거의 흙으로 변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 현장을 만나는 일은 유쾌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나를 만나 새로운 대상을 직면하는 시간의 길 위에 문득 우리가 잊었던 먼 과거의 사람들이 오늘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착각을 상상하는 순간, 그 유쾌하지 않은 기분은 금방 엄숙한 반성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다. 글=김진영 부국장 cedar@ 사진=유은경기자 usyek@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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