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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보이는 교실'이라는 어느 시인의 시제처럼 교문을 지나면 탁 트인 바다가 펼쳐진 '주전초등학교 동해분교'.

 

그때를 돌아보니
엄마의 욕심이
너의 시간을  메마르게 하는 지 몰라…
너의 '지금'이 훗날 너의 '그때'가 되듯
추억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쌓이는거야

 

 사랑하는 아들 현수야!
 겨울방학을 마치고 네가 다시 학교생활을 시작한 지도 벌써 5일이 지났구나. 이제 일주일 후면 네가 그토록 바라는 '새뱃돈'을 실컷 받을 수 있는 설날이고, 또 그 다음은 너의 초등학교 졸업식이겠구나. 한 달 후면 중학교 입학식일테고. 올해는 연초부터 특별한 날들이 많지만 요즘 엄마에게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건 바로 '해'가 길어졌다는 거야. 해가 길어졌다는 건 추운 겨울도 곧 있으면 끝이 나고 새 봄이 다가옴을 의미하겠지. 새 봄이 다가온다는 설렘과 동시에 밀려오는 것은 '우리 현수가 벌써 초등학교를 졸업하는구나', '시간이 참 빨리도 흘러가는구나' 하는 지나간 기억들에 대한 아쉬움이란다.
 
 개학을 앞두기 이틀 전 토요일, 유난히 동물을 좋아하는 네가 주전해수욕장에서 정자 가는 길에 폐교 하나가 있는데 거기서 뱀이랑 도마뱀 등을 키우고 있으니 주말에 같이 가보자며 나를 보챘지. 그래서 구름이 많이 낀 토요일 오후에 너와 나는 부랴부랴 북구 당사동에 있는 '동해분교'로 갔어. 옛날 학교 모습을 그대로 보존해 놓은 학교 건물에 어릴 적 보았던 세종대왕 동상, 책을 보는 어린이 동상, 이승복 어린이 동상까지… 여기에 운동장에서 바로 바다가 보여서 더더욱 학교 다닐 때가 생생하게 다가오더구나. 함께 여러 종류의 파충류를 보고 사진도 찍고,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동물들도 흥미로웠어. 하지만 사실 (이제야 고백하건데) 더욱 흥미로웠던 건 파충류 전시관을 다 둘러보고 학교 직원이 "아직은 다 완성되진 않았지만 이곳도 한번 둘러보세요"라고 소개한 '추억의 학교'와 '60~70년대 생활 모습'을 그려놓은 벽화였어.


 첫 번째 교실은 유리관 안에 있던 옛날 교과서와 상장, 졸업장, 성적표 그리고 그 당시 유행했던 물품들을 전시하고 있었지. 지금의 컬러풀하고 세련된 교과서와는 달리 어려운 한자가 섞여있고 그림마저 흑백인 재미없는 교과서지만 막상 유리관 안에 있는 책들을 보니 마구 꺼내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 지금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책 속에 있는 내용들을 모두 외울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수우미양가'와 학생의 학교생활을 선생님의 정성어린 수기(手記)로 적은 갈색 빛바랜 성적표을 보고 네가 "엄마, 엄마는 학교 다닐 때 공부 잘했어?"하고 물었지. 순간 마음 한구석이 살짝 '뜨끔'했어.


 두 번째 교실은 말 그대로 '교실'이었지. 엄마 학교 다닐 때 교실 말이야. 숙제를 안 해 와서 혼나는 아이들과 한 쪽 구석에서 벌을 서고 있는 아이들. 그리고 책상에 앉아서 익살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들 모두 웃음을 절로 자아내게 만들더구나. 특히 책상 한 가운데 있는 옛날 난로와 그 위에 쌓여진 황금빛 도시락 통을 보며 점심시간 때가 생각났어. 이른 아침, 교실에 와서 가장 먼저 했던 건 집에서 바리바리 싸 온 도시락을 얼른 난로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어. 겨울철, 이것만큼 확실한 보온도시락은 없었을 거야.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에 따뜻하게 데워진 도시락을 먹으며 친구들과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는 즐거움은 학창시절에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닐까 싶어.


 교실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닥종이 인형에 어린시절, 그 때의 내 모습을 그려보고 있는데 네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지. "엄마, 피아노에서 소리가 안 나. 오래된 거라서 그런 거야?"라고. 엄마는 웃음을 꾹 참으며, "이건 풍금이라고 하는 거야, 밑에 있는 페달을 밟아야 소리가 나지"라고 답했지. 하긴, 지금은 학교마다 음악실이 있으니 그곳에서 풍금보다 2배나큰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노래를 배우고 있겠구나. 우리 때는 학년에 한 대꼴, 아니 심지어는 학교 전체에 풍금이 2~3대 밖에 없어서 음악시간이 되면 수업 중인 옆 반 교실에 양해를 구하고 2~3명의 아이들이 무리를 지어 풍금을 운반했단다.


 "엄마, 나 아까 전에 봤던 동물들 한번만 더 보고 올게"라고 말하는 너를 보며 엄마는 괜히 "왜? 재미없어? 이걸 보면 너도 교실에서 이렇게 지내고 있지 않니?"라며 보챘지. 하지만 우리 현수는 무심하게도 "별로…"라고 답하며 교실 밖으로 나갔지.
 네가 다시 동물들에게로 돌아간 사이, 엄마는 마지막 세 번째 교실을 홀로 돌아보며 그 때 당시 내가 살던 동네를 그려봤어. 양옥이 많이 없던 시절이었으니 기와지붕 집에 듬성듬성 초가지붕집이 있고, 초가지붕 주위에는 감나무가 있어서 가을이 되면 다홍색으로 진하게 물든 감이 우리 집으로 툭 하고 떨어지길 간절히 바랐던 그때를 그렸어. 그리움이라는 연필로 말이지.


 현수야! 뜻밖에도 엄마의 '그 때'를 만난 지난 주 토요일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내 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 나도 어린 시절에는 바깥에서 친구들이랑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뛰놀았는데, 정작 네게는 "이제 곧 중학생이 되니 더더욱 공부에 열중해줬으면 좋겠구나"라며 가끔씩 잔소리를 했지. 어쩌면 엄마의 욕심이 현수의 시간을 메마르게 하는 지도 모르겠구나. 돌아오는 차 안에서 너는 이렇게 말했지. "엄마, 아까 그 학교에 왔던 고등학생 형들도 그 인형들 있는 교실 보면서 '나는 추억이 없어' 이러던데…? 솔직히 그 형들 말에 완전 동감. 추억은 없는 것 같아."
 
 그래, 현수야. 엄마도 너에게 엄마의 '그 때'를 애써 이해시키고 싶지 않아. 왜냐하면 추억은 애써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더욱 중요한 건, 우리 현수에게도 현수만의 '그 때'가 있을 거야. 엄마는 말야 인터넷 상으로 친구들을 만나 컴퓨터 게임을 즐기고 2PM이나 소녀시대 형·누나들 얘기를 나누고 있는 '지금'이 너의 '그 때'가 되어 추억으로 다가 올 것이라 믿어. 30년이 지난 후, 너의 아들딸들에게 그 때, 그 시절의 얘기를 해주며 추억을 그리고 있을 너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만 줄일게. 안녕.
   2010년 2월5일 금요일 초저녁에 엄마.

 

 글=윤수은기자 usyse@, 사진=김정훈기자 idacoya@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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