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노거수(老巨樹)는 한 마을의 전설과 설화와 고유신앙 등 주민들의 삶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오래되고 큰 나무다. 사람의 수명은 오래 가야 기껏 100년에 불과하지만, 노거수는 수백년을 마을과 함께 살아 왔다. 수백년을 살며 마을의 아픔과 기쁨을 지켜봤다.

 

   당산나무로 정해져 성황당을 두고 있다. 동제(洞祭)를 지내는 제삿터였다. 그 큰 덩치로 드넓은 그늘을 만들어 주민 쉼터이자 집회장소로 제공했다. 놀이와 축제와 정보 교환과 화합의 마당으로 쓰였다. 오랜 세월을 살아왔기에 마을의 산림과 수목의 대표로서 빼어난 자연경관을 만들고, 동식물의 서식처 구실도 했다.

 

   지질과 기후와 식생을 비롯한 지역의 과거 환경을 알려주는 자료로서의 가치도 크다. 마을의 정신적인 기둥으로서 자연과 문화의 상징이다. 주민 삶과는 결코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왔다. 울산에도 단위 마을을 넘어서서 지역 공동체의 표상으로 자리매김되는 노거수가 많다. 그래서 노거수는 바로 문화재다. 그러므로 울산의 노거수를 살펴보면 울산의 참모습이 보인다. 노거수 기행 <고목(古木)이 있는 풍경>을 마련한 큰 뜻이다.

 

   울산광역시 중구 태화동 옛 태화동사무소 옆에 있는 300년생 이팝나무를 살펴보려면, 그 곳의 유래부터 아는 게 먼저이다. 그 일대는 울산의 맥박이 고여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건너편 태화강 용금소 벼랑 위에는 지금 울산의 상징 태화루 건립공사가 한창이다.


 태화(太和)란 이름은 울산에 다름 아니다. 인근 반탕골 황모산 아래에 있었던 대가람 태화사(太和寺)에서 비롯됐다. 신라의 이데올로그 자장율사가 중국에 유학중일 때 태화지(太和池)란 못을 지나다 용을 만났고, 그 용의 권유에 따라 귀국해서 용을 위한 절을 지었다. 그 절이 바로 태화사였다. 태화강도 그 절 앞을 흐르는 강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절은 사라지고 없어도, 그 이름은 태화강과 함께 살아 남아 울산 사람들의 마음에 활활 타오르고 있다. 그러므로 그 절의 문루(門樓)에서 비롯된 태화루를 짓기 위한 시민들의 염원이 모아져 태화루 건립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신라 거승 자장율사 불심 서린 태화동
   좁은공터에 뿌리내린 300살 이팝나무


 일제강점기 초에만 해도 지금 태화루 건립공사가 한창인 용금소 벼랑 위의 북쪽에 있는 4차로 도로는 아예 나있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의 지적도를 보면 그 곳은 사적지에다 야산으로 표기돼 있었다. 길은 그 곳에서 300여m 가량 떨어진 지금의 우정동 선경아파트 앞에 나있었다. 그 곳에서 'ㄱ'자형으로 이어진 형태의 길을 거쳐서 지금의 동강병원 앞을 거쳐 다운동과 삼호동 방향으로 갈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초 지적도에 사적지라고 나와 있는 것은 그 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지만 태화루의 문루에서 비롯된 원(原) 태화루가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조선 때의 기우단(祈雨壇)과 사직단(社稷壇)도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선의 왕경(王京) 한양에는 임금이 직접 땅을 주관하는 신(神)인 사(社)와 곡식을 다스리는 신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있었다. 각 고을에도 마찬가지로 그 고을의 땅과 곡식을 주관하는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사직단을 두고 있었다. 고을의 수령이 사직단에 나가 제사를 지냈다.
 영조 25년(1749년)에 만들어진 울산 최초의 인문지리지 학성지(鶴城誌)에는 '사직단과 성황사(城隍祠)가 모두 부(府)의 서쪽 5리(里)에 있다. 태화루 옛 터의 서쪽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그런 유서 깊은 곳에서 자라고 있는 이팝나무는 2000년 7월4일 중구청이 중구 노거수 제1호로 지정했다. 전국의 기초자치단체마다 오래되고 큰 나무를 골라 노거수로 지정하고 있다. 하지만 노거수로 지정됐다고 해서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훼손을 해도 제재를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울산시도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조례를 만들어 5개 구·군이 노거수를 지정하게 했다. 울산의 지정 노거수는 280여그루나 된다.
 실질적인 보호를 하려면 선언적인 의미에 불과한 노거수로 지정할 게 아니라, '보호수'나 '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 보호수로 지정되면 산림법 제67조에 의해 비로소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다. 보호수 지정이 쉽지가 않다. 노거수가 자라고 있는 곳이 거의가 사유지로 지주의 동의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울산의 보호수가 19그루에 불과한 이유다.


 태화동의 이팝나무가 있는 곳의 지번은 태화동 35-13번지이다. 동강병원으로 가는 4차로 도로에서 좁은 골목길을 10여m 들어가면 옛 태화동사무소가 나온다. 그 초입에 20여평의 빈터에 무성한 잎을 매단 이팝나무 세 그루가 자라고 있다. 원래는 여섯 그루가 자라고 있었으나, 절반만 남았다.
 보호수로 지정된 것은 1m 거리를 두고 북쪽에 있는 두 그루이다. 금슬 좋은 부부인 듯 나란히 붙어 자라고 있다. 북쪽 귀퉁이에는 기와지붕에 네 면이 콘크리트로 된 퇴락한 성황당이 있다. 이팝나무는 제당에서부터 뻗은 새끼줄을 칭칭 감고 있다. 동네의 번영과 안녕을 지키는 당산나무이다.


   보호수로 지정된 이팝나무 두 그루의 나이는 300년. 키는 16m이고, 나무둘레는 3.4m와 1.6m이다. 동쪽 것은 3m 높이에서 세 줄기로 나뉜 뒤에 곧게 뻗었다. 서쪽 것은 15도 가량 비스듬히 뻗다가 2.8m 높이에서부터 네 가닥으로 나뉘었다. 작은 줄기 한 가닥은 당집 지붕을 온통 뒤덮었다. 동쪽 것이 서쪽 것보다 크다.
 두 그루와 떨어져 남쪽에 있는 것은 키는 조금 작지만, 몸통은 그리 작지는 않다. 땅에서 45도 가량 비스듬히 뻗어 오르다가 1.5m 높이에서 골게 자랐다. 가지가 남쪽에 있는 주택으로 뻗어 창고 등을 뒤덮고 짙은 녹음을 드리우고 있다.


 이팝나무는 쌀밥과 같은 흰꽃을 흐드러지게 피울 때가 그 아름다움의 절정을 이룬다. 완미(完美)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는 초여름 문턱에 들어서서 5월 초 입하 전후로 흐드러지게 피었던 흰꽃은 죄다 땅에 떨어져 비틀어지고 누렇게 말라버렸다. 짙은 초록색 잎만을 매달고 있다. 사방으로 가지를 내뻗었지만, 주택에 갇혀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하고 있다.

 

   유구한 세월품은 가지 펼치지 못하고
   고작 노거수 지정 '푸대접' 서럽구나


 이팝나무 아래에는 중구청이 만든 보호수 표지판과는 별도로 주민들이 표석을 세워놓았다. 표석에는 이팝나무가 400년생이라고 적혀 있다. 그 키와 굵기로 봐서는 400년생이라고도 할만 하다. 표석 앞에는 '태화 이팝나무'와 함께 이팝나무의 한자어 '육도목(六道木)'을 적어 놓았다. 뒤에는 '마을의 수호 정자나무이므로 무성하게 자라나기를 기원한다'고 적혀 있다.
 이팝나무는 슬픈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옛날 자식을 제대로 먹이지 못해 죽게 한 아비가 있었다. 그 아비는 아이의 시체를 떠메고 마을 어귀의 작은 동산에 고이 묻었다. 아이를 묻은 아비는 저승에서라도 이밥을 원도 없이 먹기를 바라며, 이팝나무를 한 그루씩 심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작은 마을 동산은 이팝나무 숲이 됐고, 해마다 이밥 같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고 한다.


 입하를 전후해서 이팝나무가 꽃이 피운 상태에 따라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예측했다고 한다. 꽃이 일시에 화려하게 피면 풍년이 들고, 꽃이 잘 피지 않으면 가뭄이 드는 해라고 해서 우리 선조들은 이팝나무를 신목(神木)으로 쳤다.
 이팝나무는 그러므로 입하 전후에 밥그릇에 수북수북 이밥을 퍼놓은 것처럼 송아리로 꽃을 피운다고 해서 한자어로 입하목(立夏木)이라고 불린다. 또 일부 지역에서는 뻣나무라고도 한다.
 태화동의 이팝나무는 그 자리잡은 터의 유서 깊음과 함께 울산 고을의 수호나무로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한창 공사가 진행중인 태화루에만 관심을 보일 것이 아니라, 신령스러움을 지닌 울산의 수호나무 태화동 이팝나무에도 더 많은 관심을 기울어야 한다. 다른 지역의 천연기념물 이팝나무에 결코 뒤지지 않는 태화동 이팝나무를 울산의 나무로 키워나가야 한다. 김종경 대기자 kimj@ulsanpress.net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