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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우정동 200년생 회화나무. 우리 선조들은 회화나무를 '학자·출세의 나무'라 여겨 이사를 갈때도 종자를 챙겨갔다고 한다, 그 성스러운 회화나무가 지자체에서 내건 노거수 표지판 하나로 모든 대접을 다 한듯 한 느낌을 받아 더욱 씁쓸하다. 김정훈기자 idacoya@ulsanpress.net

 

눈맛을 새롭게 화사하게 하며 타오르던
연둣빛 천지가 어느새 초록물결로 파도치고 있다.
넘실넘실 초록물결을 타고 대지는 따글따글
익어가고 있다. 제주도부터 장마가 시작됐다는
예보 속에서도 해는 연일 불볕더위를 퍼붓고 있다.
한낮에는 길을 가는 일이 여간 곤욕스럽지가 않다.
조금만 걸어도 등줄기에는 온통 땀이 쏟아진다.


그래도 이맘 때가 낙엽수종의 노거수
기행에는 제 격이다. 짙푸른 잎을 매단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 좋기 때문이다.
무덥던 지난 주말에 또 다시 울산 고을의
성황단(城隍壇)이 있었던 중구 우정동의 당산나무
회화나무를 찾았다.
우정동 당산나무인 회화나무가 있는
지번은 우정동 276-49. 조선시대에 울산고을의
성황단이 있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울산 정신문화의 터전이다. 그런 내력을 적은
표지판이 세워져 있지만, 눈 여겨 보는 이는 드물다.
지자체도 관심을 제대로 기울이지 않아 퇴락한 모습이
정녕 볼썽사납다. 걸핏하면 정체성을 바로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야말로 말 뿐임을 실감할 수 있다.
낮은 울산 문화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다.

 

   학자·출세의 나무로 진귀한 대접
   옛울산고을 수호樹 성스러운 자태
   무엇하나 버릴것없는 利木 노거수
   모진세월 생채기도 부덕인듯 품어

 

 그 터를 제대로 가꾸지 않음에 가슴이 아프지만, 그 터가 울산 역사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마 제대로 알았으면 한다. 그 곳의 유래를  다시 더듬어 보는 이유다.
 조선시대에 각 고을의 관아에서 지낸 공적이고 정규적인 제사의 대상으로는 향교에 모셔진 문묘(文廟)와 삼단(三壇)이 있었다. 삼단이란 고을의 토지신 사(社)와 곡식신 직(稷)에게 제사를 지낸 사직단(社稷壇)과 고을의 수호신을 모신 성황단(城隍壇)과 후손이 없는 잡귀를 위해 제사를 지내주는 여단(勵壇)을 말한다. 울산도 문묘와 삼단을 갖추고 있었다.
 성황단은 성황당(城隍堂) 또는 서낭당과 같은 뜻은 지니고 있지만, 한 고을의 수호신을 모신다는 점에서 마을의 수호신을 모신 성황당보다는 그 품격이 높다. 울산 고을의 성황단은 중구 북정동과 옥교동, 성남동, 교동 일원에 걸쳐 있었던 울산읍성 안에 있었다. 조선 후기에 지금의 우정동의 성황당과 당산나무 회화나무가 있는 우정동 276-49 일대에 옮겨졌다.


 영조 25년(1749년)에 편찬된 울산 최초의 인문지리지 학성지(鶴城誌) 사묘(祠廟)조에 '사직단과 성황사(祠)가 부(府)의 서쪽 5리(里)에 있다. 태화루 옛 터의 서쪽이다'고 기록돼 있다.
 울산 고을의 성황단[사]에는 고을의 수호신인 계변천신(戒邊天神)이 모셔졌다. 계변천신은 나말여초에 계변성에 웅거했던 신학성(神鶴城) 장군 박윤웅(朴允雄)을 일컬는다.
 계변성은 신라 때에 신학성이라고 불렸다. 신라 효공왕 5년(901년)에 학 두 마리가 금으로 된 신상(神像)을 물고 계변성 신두산(神頭山)에서 우는 것을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겨 신학성이라고 한 것에서 연유한다. 계변성, 즉 신학성이 있었던 신두산은 울산MBC와 충의사, 구강서원이 있는 곳이다. 학성공원을 신학성으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계변성이 신학성으로, 그리고 다시 학성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므로 학성은, 곧 울산이다.


 울산 고을의 수호신 계변천신을 모신 성황단이 우정동 마을의 성황당으로 그 품격이 낮춰진 이유와 시기는 알 수가 없다. 일제가 우리의 정신문화를 말살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비록 지금은 우정동 한 마을의 수호신을 모신 사당으로 품격이 떨어졌을지라도, 주민의 안녕과 번영을 지켜오던 곳으로서의 그 성스러움이야말로 만대에 빛나고 있다.
 그런 성스러운 곳이기에 길상목(吉祥木) 회화나무가 자라고 있다. 아카시나무로 착각할 정도 그것과 흡사한 잎을 가진 회화나무는 서원이나 명문 집안의 정원에서 볼 수 있는 선비들의 학자(學者) 나무다. 옛날에는 양반이 이사를 갈 때에는 쉬나무와 회화나무의 종자는 꼭 챙겨갔다.
 쉬나무를 심어서 종자를 따면 등잔불을 밝히는 기름으로 썼고, 회화나무는 자신이 고고한 학자임을 널리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심었다고 한다.


 또 회화나무를 집안에 심으면 후손 중에서 유명한 학자가 태어난다고 했다. 회화나무가 세 그루면 대길(大吉)한 일만 생긴다고도 했다. 우리 선조들은 회화나무를 크게 상서로운 나무라고 해서 최고의 길상목으로 쳤다.
 회화나무는 아무나 심을 수가 없었다. 조선 때에는 학자나 권세 있는 집안에서만 심을 수 있었고, 평민들은 심을 수 없었다. 평민들은 회화나무를 심지는 못했지만, 신목(神木)으로 여겼다.
 그것은 회화나무의 꽃이 필 때 위에서 먼저 피면 그 해 농사가 풍년이지만, 아래에서 먼저 피면 흉년이 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마치 이팝나무가 복스럽고도 탐스러운 꽃을 피우면 그 해 농사가 풍년이 든다고 믿은 것처럼 말이다.
 회화나무는 출세의 나무로도 알려져 있다. 그런 관습은 고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중국인들은 지금도 회화나무를 심으면 출세길이 열린다고 믿고 있다고 한다. 한 술 더 떠서 진실을 규명하는 나무라고도 믿었다. 중국의 고대 재판관들은 판결을 내릴 때에 한 손에 회화나무의 가지를 들고 있었다고 한다. 회화나무가 신성한 힘으로 진실을 규명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우정동의 당산나무 회화나무를 찾으려면 동서로 길게 뻗은 원도심의 중심도로인 학성로 위쪽의 길을 따라 우정삼거리 방향으로 가야 한다. 성남플라자를 지나 우정삼거리에 못 미쳐 왼쪽에 광보한의원이 나온다. 그곳에서 북쪽으로 나있는 좁은 마을 안길을 따라 10m쯤 들어가면 짙푸른 잎을 매단 회화나무를 만난다. 주변의 마을 안길은 온통 당산길이거나 당산안길 등으로 표시돼 있다.
 회화나무는 마을 안길보다 1m 높은 곳에서 자라고 있다. 200여평 남짓한 부지는 축대를 쌓은 뒤에 그 위에 알루미늄 울타리를 세워놓았다. 나무는 부지의 남쪽에 치우쳐 있다. 서쪽은 광보한의원쪽에서 들어오는 좁은 마을 안길이 지나고, 길에 잇대어 선술집과 주차장으로 이용되는 작은 빈터가 있다. 나머지 세 방향은 2~3층 짜리 건물이 둘러싸고 있다.


 회화나무는 한 그루인데도 마치 두 그루처럼 보인다. 가운데 부분이 썩어 오래 전에 외과수술을 한 바람에 두 부분으로 나뉜 탓에 그렇게 보인다.
 중구청이 세워놓은 노거수 표지판에는 나이를 약 700년이라고 적어놓았지만, 울산생명의숲 측은 150~200년이라고 한다. 표지판에는 높이는 15m, 둘레는 4.7m로 적혀 있다. 울산생명의숲은 높이는 10.5m, 가슴높이 둘레 2.66m, 뿌리부분 둘레 4.47m, 수관폭 17m라고 밝히고 있다.
 남쪽 부분은 45도 가량 기울어 자라고 있다. 아래쪽은 외과수술한 흔적이 커다랗게 남아 있다. 그 위 표피에 작은 가지가 촘촘히 나있다. 생명의 끈질김을 실감케 한다. 줄기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간 가지는 남쪽의 집 옥상까지 뒤덮었다.


 북쪽의 다른 부분은 10도 가량 북쪽으로 기울어 자라고 있다. 높이 3m 지점에서 4개의 큰 가지로 나뉜 뒤에 사방으로 작은 가지를 내질렀다. 가지가 처지는 것을 막느라 2곳에 V자 형태와 I자 형태의 철재 받침대를 세워 놓았다. 또 두 부분의 줄기에 큰 철재 못을 박은 뒤에 그곳에다 철사줄을 감아 팽팽하게 조여 놓았다.
 동쪽 나무 아래에 당집이 있다. 기와지붕에 사면은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다. 건립된지 수십년이 흘러 심하게 낡았다. 부지 안에 중구청이 지난 2000년 7월 초에 노거수로 지정하고, 표지판을 세워놓았다. 하지만 내용이 울산생명의숲이 밝힌 것과는 다르게 돼있어서 바로 잡아야 한다. 담장 바깥에는 성황당과 회화나무의 유래에 대한 표지판도 세워져 있다. 성황당에 대한 내용도 잘못 돼 있다.


 회화나무는 잎은 단아하고 깨끗하지만 수형(樹形)은 기묘해서 아래에서 위로 쳐다보면 다른 나무에서는 느낄 수 없는 특별한 위엄을 갖추고 있다. 또 길상목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사람에게 무척 이(利)로운 나무다.
 한방에서는 버릴 것이 없는 소중한 한약재로 알려져 있다. 꽃을 말린 것은 괴화(槐花)라 해서 고혈압에 좋고, 지혈효과가 있다. 꽃에서 나온 꿀은 최고급 꿀로 꼽힌다. 그 밖에도 열매와 잎, 줄기 등도 여러 가지 용도의 병증에 효과가 있다.
 그런 나무이기에 우리 나라에는 회화나무를 많이 심었다. 마을 이름에 괴(槐)자가 들어가 있으면 회화나무가 있는 마을을 뜻한다.
 부산의 사하구 괴정동(槐亭洞)은 바로 회화나무가 자라고 있어서 마을 이름이 그렇게 붙었다. 천연기념물 제316호인 회화나무가 있다. 부산 괴정동 외에도 전국 10여곳에는 500년에서 700년생의 우람한 노거수 회화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그들 천연기념물 회화나무 만큼은 못해도 우정동의 회화나무도 울산의 노거수 가운데 손꼽을만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더욱이 자라고 있는 그 터의 역사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 곳의 소중함과 노거수 회화나무의 귀함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 울산 정신문화의 맥을 잇기 위해서도 시급히 재정비에 나서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태화루 복원과 함께 사직단을 다시 세우기로 했으므로, 그 당위성이야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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