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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최종두 시인

1.공업축제 속에서 시작된 처용문화제

"울산의 문화계를 돌아본다." 처용문화제를 중심으로.
 나는 이런 제목이나 이런 쪽에 가까운 글은 쓰기를 자제해 왔다.
 숱한 글을 써야하는 글쟁이가 무슨 글인들 못쓸까마는 유독 이 글에 대해 기피해온 것은 그래도 젊은 시절 열정을 다 바쳐 뛰어들었던 기억들이 나의 뇌리에 너무나 생생히 살아있고 그렇게  살아있는 기억 가운데는 보람스러운 일이 많았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늘 푸른 젊음만 있으려니 하고 세상을 두렵지 않게 여기던 삶도 이제 모두가 후회로 가득하고 회한만이 떠오르는 시점에 서 있는 나로서는 이제 훗날을 위한 일에 관심을 둘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니 당시에는 그것이 최상의 방법이었더라도 지금은 쓴 웃음밖에 남아있지 않고 보니 그럴 수 밖에 없다.
 사실 내 젊은 시절에 뛰어들었던 그 열정으로 말미암아 나에게는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더 많지 않나하는 생각도 들고 있다.
 때문에 나는 글을 쓸 수 밖에 없다. 생명을 다 하는 순간까지….
 이번에 쓰려고 하는 이 글은 보는 이에 따라 시각을 달리 할 수 있다. 또 연재를 해주는 신문사의 편집방향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게 달리 할 수 있는 견해도 과거를 돌아보는 가운데서만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으리라 믿는다.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고 그것은 미래의 새로운 창조이기 때문이다. 거의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분분한 이견들로 뒷말이 무성한 처용문화제도 그런 관점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1967년 2월말 즈음이었다. 나는 당시 울산문화원장이었던 고 박영출(朴榮出)원장과 함께 시청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했다. 지금의 중구 옥교동 사무소가 울산 시청사였다. 울산 읍사무소로 사용됐던 곳이니까 시청사가 건립되기 전까지 임시청사로 쓰고 있을 때 였다.
 약 60여명이 모여 있었다. 그렇게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축제라는 소리가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울산 축제라는 것은 시내 한복판의 대로(大路)에서 동서로 가른 시민들이 줄 당기기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고 동별로 축구시합을 벌이는 것이 큰 잔치로 여겼기 때문이다. 축제라는 말이 생소할 수 밖에 없었다.

 박원장과 함께 앞줄의 빈자리에 앉았더니 곧 회의가 시작되었다.
 회의장이 아닌 시장실을 개방해 앉혀도 모자라 복도에까지 들어선 사람들 앞에 시장이 나타나 꾸벅 절을 하고는 "울산 시장 최병한(崔炳翰)입니다. 여러분은 지난 2월 3일에 있은 공업센터 선포식을 보셨겠지만 이제 울산은 손바닥만한 읍소재지가 아니고 한국을 대표해서 세계적인 공업도시, 즉 루르의 기적을 초월하는 공업도시가 될 것입니다. 정부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울산땅이 들썩거릴 정도의 큰 잔치를 벌이도록 지시 하셨습니다. 이 지시는 우리 고장출신의 이후락(李厚洛)실장은 말할 것 없고 최고회의 박정희의장님이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계신 사항이어서 조금도 미비점이 없이 성공적으로 일사분란하게 해내야 할 일입니다."

 그때 복도에 앉은 어떤 분이 벌떡 일어섰다. 
 "시장님, 아따! 소문대로 참 박력이 있어 보이는데 나는 여기 오는 것을 구장(이장里長)이 무조건 나오라고 해서 나왔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다 그 축제를 준비하는 실무자가 된다는 말입니까? 실무자를 몇 사람 뽑아서 일을 시키도록 하고 여기 온 사람들 함양집 비빔밥이나 한 그릇 묵고 가도록 해 주이소. 명색이 축제 준비를 하러 간다고 왔으니 말입니다."

 좌중에는 금방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정도로 당시의 민도는 낮기만 했다.
 최병한 시장은 부임 초의 소문대로 보기드문 밀어붙이기 식의 행정가였다.
 그 무렵 울산출신의 이후락 실장이 이계순 경상남도지사에게 추진력있고 능력있는 행정가를 골라 울산시장으로 보내달라는 주문에 의해 발탁된 유능한 시장이었다. 그는 한번 하겠다고 결심한 일이면 어떻게라도 해내고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인 동시에 브리핑 잘 하기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당시는 브리핑만 잘해도 출세한다는 시절이었다.

 최시장은 그날의 회의에서도 구구한 의견들을 잘 정리하면서 짧은 시간에 회의를 마무리하고 함양집 비빔밥 한 그릇씩을 제공해주었다. 회의 결과는 이러했다.
 1.축제의 명칭은 공업축제로 한다.
 2.많은 울산시민이 참여하도록 최선을 다한다.
 3.축제에 필요한 예산은 충분히 지원한다.
 4.소학교운동회·학예회정도가 아닌 올림픽을 개최한다는 생각으로 행사계획을 짠다.
 5.행사일자는 4월19일로 한다.

 회의에서 기획실무위원으로 선출된 나는 박영출 원장과 같이 따로 시장실에 남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려면 공설운동장 밖에 장소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공설운동장도 축제와 함께 계획돼 있는 공업센터 기념탑 준공식 때문에 다른 곳으로 정해야 했다. 결국 지금의 울산광역시청 뒤편인 구획정리 사업장으로 옮기기로 했다.
 최병한 시장은 박영출 원장과 나를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사람을 많이 모아야 됩니다. 꼭 많이 모이도록 하시오!"
 사뭇 명령조였다.
 "예"하고 나온 다음부터 나는 고민에 빠졌다.
 고민스럽기는 박원장이 훨씬 더 컸을 성 싶었다. 고향에서 겨우 시화전 한 번 열었다고 문학을 함네하던 20대의 애송이 문학청년에 불과했던 나로서는 사실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몇날 며칠을 머리를 싸매고 궁리를 해봐도 사람을 어떻게 하면 많이 모을 수 있을까하는 묘안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한 고민을 워낙 세심하면서 합리적인 사고로 모든 언행을 옮겼던 박영출 원장은 나보다 훨씬 더 고민에 빠진 것 같았다.

 사흘이 멀다하고 나를 찾다가 나중에는 이틀에 한 번씩 나를 찾아오는 것이었다. 그것도 오실 때 마다 빈손으로 오는 날이 없었다.
 과일이나 과자류가 아니면 꼭 서점에 들러 책 한권을 사들고 와서는 "최형, 시장님이 진주 개천예술제를 예로 들면서 대회취지문과 축시를 읽어야 된다고 하시니 그 둘도 최형이 준비를 해주셔야 되겠습니다."

 박영출 원장은 아들 같이 어린 나에게는 말할 것도 없지만은 손자뻘 되는 고등학생에게도 말을 낮춰하는 법이 없었다. 또 축제준비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의견대립에도 이해가 될 때까지 그 사람을 찾아가 이해를 시킨 다음에야 잠자리에 드는 성품이었다.
 박영출원장은 그런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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