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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의 노거수 280여 그루 가운데 천연기념물은 울주군 두서면 구량리 중리마을에 있는 은행나무가 유일하다. 황금들판을 바라보는 푸른 은행잎도 곧 샛노랗게 가을이 물들 것이다. 유은경기자 usyek@ulsanpress.net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가로수가 더욱 제 빛을 내고 있다.
고찰이나 서원 또는 고택을 찾으면 수백년생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반갑게 맞아준다.
그만큼 선조들은 은행나무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래서 은행나무를 즐겨 심었고, 때문에 거목이 된
은행나무가 전국 곳곳에서 자라고 있다. 울산에도 100년이 넘는 노거수 은행나무가 10여 그루에 이른다.

선비의 절개처럼 곧은 생명력
고찰·서원·고택엔 어김없이 은행목

키 18.5m·수관폭 34.5m '아름드리'
수생 500~550년 추정 귀하디 귀한 몸

화마에 타들어가고 태풍에 치여
온몸 상처 투성이…보호 손길 아쉬워


은행나무는 공자의 학문을 가르치던 향교나 서원이면 거의 어김없이 심어졌다. 물론 선비의 집안에도 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다면 공자의 학문을 가르치는 곳에는 어떤 이유로 은행나무가 심어졌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바로 공자가 제자를 가르친 행단(杏壇)에서 연유됐다고 한다.
 그러나 한자의 행(杏)은 살구나무를 의미한다는데, 어째서 살구나무 대신 은행나무가 심어졌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행단의 행을 살구나무로 알고 있는 이들은 은행나무를 심은 것은 살구나무가 신목(神木)이 아니고 벌레까지 들끓어 보기에 흉한 탓이었다고 해석한다. 나아가 행단의 행을 은행나무로 잘못 이해했거나 은행나무가 아주 오래 살 뿐만 아니라 선비나 군자의 기상을 빼닮았기 때문이었다고도 봤다. 유학이 국가이념인 국가에서는 군자의 기상을 마음에 새기고 본받는 것이 지상명제였으므로 은행나무를 심고 키울 수 밖에 없었으리라.

 

 

   
▲ 가장 큰 북쪽 밑둥치의 수세는 덩치에 걸맞지 않게 불에 탄 상처와 태풍의 생채기로 철제 받침대로 지탱하고 있다.

 


 은행나무는 고생대에서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유일한 식물이다. 무려 5억년의 역사를 가졌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생명체가 사라진 빙하기에도 거뜬히 살아남은 귀한 존재다.
 이 세상의 생명체가 어떻게 태어나고 사라졌는지를 지켜본 유일한 생존자다. 그로써 1과 1속의 살아 있는 화석인 셈이다. 홀몸으로 살아남은 곳이 중국 절강성 북쪽에 있는 하늘의 눈을 뜻하는 천목산(天目山)이었다.
 그 긴 세월을 견뎌내며 홀로 살아남았는데도 놀랍게도 제 이름조차 제대로 갖고 있지 않다. 은행(銀杏)이란 말은 '은빛 살구'를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즉, 살구를 닮은 열매에 흰 빛이 돈다고 해서 그렇게 불렸다는 것. 중국에서는 압각수(鴨脚樹) 또는 공손수(公孫樹)라고 부른다. 잎의 모양이 오리발을 닮았다고 해서 압각수라 하고, 손자 대에 가서야 열매를 얻을 수 있다고 해서 공손수라고 한다.
 암수 딴그루의 나무로 키는 보통 4~10m 쯤 자라지만, 50m나 되는 큰 것도 있다. 잎은 짧은 가지 끝에 3~5개씩 모여서 난다. 서로 어긋나고 부채모양으로 퍼지며 가운데가 갈라지거나 불규칙하게 여러 개로 쪼개진다.

 꽃은 4~5월에 핀다. 수꽃은 1~5개씩 꼬리의 꽃차례에, 암꽃은 잎사이에 1~6개씩 달린다. 열매는 10월에 익는다. 수나무에서 날아온 꽃가루가 있어야만 암나무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지름이 1~2㎝인 공모양의 열매는 껍질이 다육질이고 악취가 난다. 껍질을 벗기면 1~2㎝ 크기의 달걀모양의 노란 씨앗이 나온다.
 목재는 단단하고 질이 좋아 가구나 밥상을 만드는 데에 널리 쓰인다. 바둑판이나 불상의 재료로도 이용된다. 단풍이 좋은 은행잎은 잘 썩지 않고 구충효과까지 있어 책을 보관하는 데에 사용된다.

 껍질을 벗긴 열매는 날 것으로 먹으면 해롭기 때문에 익혀서 쓴다. 씨앗은 진해·강장 등에 효능이 있고, 뿌리는 백과근이라고 해서 허약함을 보하는 데에 쓰인다. 잎은 백과엽으로 흉민심통과 담천해수 등을 치료하고, 최근에는 잎에서 추출한 징코민을 성인병의 약재로 사용된다.
 우리 나라에는 불교와 함께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면 4세기 말쯤에 들어온 셈이다. 하지만 유교 관련 시설물에 많이 심어진 점을 들어 전래시점을 유교의 도입과 함께 들어왔다고도 본다.

 

 

 

 

   
▲ 가장 큰 북쪽 밑둥치의 수세는 덩치에 걸맞지 않게 불에 탄 상처와 태풍의 생채기로 철제 받침대로 지탱하고 있다.

 


 한나라 무제가 한반도에 한사군을 설치한 기원전 107년 이후에 중국인들이 한반도의 목재를 약탈해가면서 반대급부로 은행나무를 들여왔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비록 중국에서 들어온 나무이지만, 민족정서에 맞아 우리 땅에 깊이 뿌리내렸다.
 잎이 싹트는 모양을 살펴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쳤다. 전염병이 돌면 은행나무에 기도를 드려 퇴치했다. 자식을 낳게 해달라고 치성을 드렸다. 신목(神木)이었다.
울산의 노거수 280여 그루 가운데 천연기념물은 울주군 두서면 구량리 중리마을에 있는 은행나무가 유일하다.

 천연기념물 제64호. 울산에서는 북구 강동동 죽전마을의 울산김씨 세전송 소나무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된 나무다.
 가을 햇살이 따가운 지난 개천절에 중리마을을 찾았다. 들판은 온통 황금물결이 넘실대고 있었다. 몇 갈래로 굽은 마을길을 지나 마을 남쪽에 있는 은행나무를 만났다.
 은행나무는 100여평 남짓한 둥그스럼한 풀밭에 자리잡고 있다. 역시 풀밭인 북쪽을 제외한 삼면은 벼논이 둘러싸고 있다. 나무가 있는 풀밭은 주변보다는 80㎝ 가량 높다.

 탐방객이 함부로 드나드는 것을 막기 위해 팔각형 철재 울타리를 세워놓았다. 울타리 안에 동쪽을 향해 천연기념물 안내판과 경고판이, 그리고 경고판 뒤에는 천연기념물임을 나타내는 표지석 두 기가 세워져 있다.
 나무에 바짝 붙어서는 동향한 한성부판윤죽은이공제단비(漢城府判尹竹隱李公祭壇碑)와 단석이 놓여 있다. 북쪽에는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안내판에는 <조선 초기에 이지대(李之帶) 선생이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선생은 고려 후기의 유명한 학자이자, 정치가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4대손이다. 1394년(조선 태조 3년) 경상도 수군 만호(萬戶)로 있으면서 왜구가 탄 배를 붙잡은 공으로 임금으로부터 상을 받았으며 그 후 벼슬이 높아져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이르렀다. 1452년(단종 즉위년)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시키는 등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선생은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내려와 살게 됐다. 이 때 서울에서 가져와 연못가에 심었던 것이 이 은행나무라고 전한다. 따라서 이 전설대로라면 이 나무의 나이는 550년 정도인 셈이다. 높이 22m, 가슴높이 둘레가 12m에 이른다. 이 나무를 훼손하면 해를 입는다고 하고, 아들을 낳지 못한 부인들이 이 나무에다 정성껏 빌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도 전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신성하게 여겨져 왔음을 알 수 있다>고 적혀 있다.

은행나무의 키와 굵기는 울산생명의숲이 밝힌 것과는 다르다.
 생명의숲은 '추정 수령은 500~550년, 키(수고) 18.5m, 수관폭 34.5m, 가슴높이 둘레 10.7m와 2m, 뿌리부분 둘레 10.8m'라고 밝혔다. 키는 3.5m 차이가 나고, 가슴높이 둘레는 생명의 숲은 둘로 나눠 밝힌 반면에 안내판에는 하나만 적어놓았다. 그러나 실제 은행나무를 보면 밑둥치는 셋으로 나뉘어 있어서 가슴높이 둘레를 셋으로 구분해서 재는 것이 맞을 것이다.
 세 가닥으로 나뉜 밑둥치는 북서쪽 것이 가장 굵다. 다음으로 굵은 것은 동남쪽에 있다. 가장 작은 것은 남쪽에 있는데 다른 두 가닥에 도저히 견줄 수가 없다.

 가장 굵은 밑둥치는 외과수술한 흔적이 크게 남아 있다. 두 차례에 걸쳐 수술을 했다고 한다. 90년대 초에 정신질환자가 나무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큰 상처를 입어 95년에 수술을 했다. 99년에도 또 수술을 했다. 온통 상처투성이다.
 설상가상으로 2003년 9월에는 태풍피해를 당했다. 큰 가지 여러 개가 부러졌다. 그런데다 나이를 먹은 탓에 기력을 많이 잃어 세 곳에 I자형 콘크리트 버팀목 세 개를 받쳐 놓았다. 심지어는 외과수술한 흔적 투성이인 북서쪽 큰 줄기에는 인조목으로 만들어진 대형 사다리형 받침대까지 세워 놓았다. 이만저만 볼썽사납지가 않다.
 동서로 길게 뻗은 마을길을 지나 남쪽에 자리잡은 은행나무를 마주치는 순간 북쪽과 서쪽이 텅 빈 균형이 맞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된다. 두 차례의 큰 외과수술에다 태풍피해까지 당해 수형을 잃었기 때문이다.

 줄기와 가지가 사방으로 고르게 뻗어나가 푸른 잎이 뒤덮인 원만한 모습을 갖춰야 하는데도 휑하니 비었다. 더욱이 동쪽에서 바라보면 북쪽이 완전히 싹뚝 잘려 나간 모습이다. 그곳에 대형 받침대까지 세워져 있어서 더욱 흉하다.
 남동쪽 농수로 근처의 전봇대 앞에서 가장 좋은 모습을 볼 수 있다. 북쪽과 서쪽의 잘려나간 듯한 부분이 가려지기 때문이다. 북쪽이나 동쪽, 그리고 나무 아래에서는 보면 많은 흠결이 눈에 띄지만, 균형잡힌 원만한 수형을 이루고 있다.

황금빛으로 물든 벼논과 그 뒤로 드높이 푸른 입을 매단 은행나무가 만들어내는 가을 풍경에 푹 빠져들게 한다. 아스라이 서쪽 저 멀리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산등성이 너머로 노을 지는 풍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시리다. 고목(古木) 은행나무만이 만들어내는 가을전설 속으로 풍덩 빠져들게 한다.
 그러나 중리마을의 은행나무가 처한 현실은 안타깝기만 하다. 이 땅의 모든 생령들을 지켜보며 550년을 내려온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잖은가.

 그럼에도 노거수로는 울산 유일의 천연기념물에 대한 보호의 손길은 소홀하다.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가운데 중리마을의 은행나무처럼 수관의 3분의 1이나 훼손된 나무는 한 그루도 없다. 그만큼 보호의 손길이 미흡했음을 증명한다.
 1,100년이나 된 경기도 용문사의 은행나무와 서울 문묘의 은행나무, 나라 안에서 가장 수형이 아름답다는 강원도 원주 반계리의 은행나무의 보호대책을 눈여겨 볼 일이다. 울산의 노거수 보호정책도 한결 나아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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