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속 풍경] 청정하거나 남루한 풍경속 고산을 찾다
[내 마음속 풍경] 청정하거나 남루한 풍경속 고산을 찾다
  • 김정규
  • 승인 2010.10.14 19:01
  • 기사입력 2010.10.14 19: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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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 죽성항
   
▲ 400여년전 고산 윤선도가 귀양온 기장 죽성항. 예전에는 백사장과 늘푸른 황학대가 절경을 자랑했지만 지금은 콘크리트와 각종 시설물로 고산의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오른쪽 소나무 서있는 곳이 황학대.

고단한 뱃길의 시간이 지워졌다. 바다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잠잠해졌고 물새들만 낮게 비행했다. 부부인 듯한 어부를 태운 어선 한 척이 포구 안으로 들어왔다.
날것들의 냄새가 두모포를 가득 채웠고, 가끔씩 바람을 타고 바다로 나갔다. 작은 포구엔 1톤 남짓의 통발어선 20여척이 발이 묵인 채 뒤척였다. 배들의 꿈은 바다에 있었으나 쉽게 나아가지 못했고, 용케 나간 몇몇의 배들도 어창을 채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두모포의 한적함
기장 대변항이 멸치와 장어로 흥청이면 바로 인근 죽성항은 고요함으로 빛난다. 죽성항의 고요함은 숨은 길로 유지돼왔다. 그 길은 에둘러 가야하는 먼 길이다. 기장군청 뒷길로 신앙촌을 스쳐 작은 산 하나를 넘어야 죽성항의 근간인 두모포다. 그래서 두모포에는 그 흔한 펜션이나 어촌체험프로그램조차 없다. 군데군데 횟집이 들어서기는 했으나 물질을 하는 아낙들의 소일거리로 운영하는 곳이 몇 곳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고요함 속에서 빛나는 풍광은 돌아서 온 길의 수고로움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바다는 가을 햇살 아래서 점점이 반짝이는데, 포구에 묶인 배들과 지붕 낮은 집들이 보여주는 풍경은 한가하다. 그 고요함속에서 파도만이 격렬하다. 때로 방파제와 갯바위를 넘나든다. 높고 크다. 그것은 400여년전 고산의 한과 울분이며 왜구에 짓밟힌 아픈 역사이자 마을 서낭당의 언어다.
  
#고산 윤선도와 황학대

   
▲ 예전의 풍광을 잃어버리고 남루한 모습으로 남은 황학대.


고산 윤선도는 1587년(선조 20년)에 서울에서 태어나 1671년 85세로 보길도 부용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생애의 절반이 귀양과 은둔으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20년의 귀양과 19년의 숨은 삶이었다.
 경사에 해박하고 의약, 복서, 음양, 지리에도 달통한 고산은 송강 정철과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벽을 이루었다.
 고산은 성균관 유생 때 예조판서 이이첨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이첨은 대북(大北)의 좌장이었고, 당시 정권은 대북의 품에 있었다. 남인이었던 고산은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됐고 1년 뒤인 1618년 겨울 기장 두모포로 옮겨졌다. 그의 나이 32세였다. 두모포의 날들은 전도유망한 현실 정치가가 고뇌와 울분을 해풍에 삭였던 세월이었다.
 죽성천을 낀 포구 한 켠에 소나무 10여 그루를 이고 선 작은 언덕이 있다. 바로 황학대다. 연황색 바위가 길게 한 덩어리를 이뤄 바다로 나아간 형상으로 본래 이름은 학바위였다.

 고산은 신선이 황학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중국 양쯔강 하류 황학루에 견주어 이곳을 황학대라 이름 지었다. 이태백, 도연명 등이 자주 찾던 황학루가 여유와 관조의 배경이라면 황학대는 혈기왕성한 젊은 선비의 꺾인 기개를 달래던 위안의 배경이다.
 고산은 이곳에서 6년여를 보내며 시조 6수를 남겼다. 고산이 35세때인 1621년 서울에서 동생 선양이 찾아와 납전해배(돈을 내고 유배를 푸는 것)를 제안하지만,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성격 탓에 거절한다. 선양을 떠나보내며 증별소제 2수를 전해준다. 서러웠던 고산의 심사는 시에 고스란히 담겨 오늘날에도 일광해수욕장 삼성대에 시비로 남아 전해진다. 고산은 1623년 인조반정이후 귀양에서 풀려 두모포를 떠났다.
 그러나 한 젊은 유배객의 서러움과 슬픔을 돌아보기엔 황학대는 안쓰럽다. 95년 태풍에 수 십 그루의 소나무가 쓰러졌고 그나마 남은 것들도 앙상하기 그지없다. 곁에는 선박입출항신고소 컨테이너와 간이 화장실까지 버티고 섰다. 400여년전 고산의 흔적은 이제 이름만 남았다. 역사에 대한 무지와 냉대에 사람들은 고산이 이곳에 6년 여 동안 은둔한 삶의 존재조차도 모를 수밖에 없게 됐다.
 인근에는 물량장 축조공사로 어수선하기 그지없고 예전  백사장으로 연결된 아름다운 해변은 시멘트와 테트라포드로 얽혀 제 모습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여섯그루가 한몸인듯 빚어낸 뛰어난 수형

   
▲ 여섯그루가 마치 한나무처럼 보이는 죽성항 해송. 직경 30m 높이 20m에 달하는 장엄한 모습이다.


황학대와 함께 두모포를 대표하는 것이 마을 언덕 위 소나무다. 멀리서 봐도 우뚝한 크기와 수형이 돋보이는 늠름함이 한 폭의 그림이다. 부산시지정기념물 제50호인 죽성리 소나무다.
 죽성리 소나무는 수령이 250~300년으로 추정되는 해송(곰솔) 여섯 그루 줄기가 한그루처럼 뭉쳐있다. 그러나 뭉쳐진 줄기와는 반대로 가지들은 저마다의 방향으로 커 나간다. 직경 30미터, 높이 20미터의 거대한 크기다. 해송은 오랜 시간을 견뎌온 만큼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진 기둥을 가진 육중함이 돋보인다. 오랜 시간을 건너왔지만 여전히 힘차고 싱싱한 몸을 가져 신비롭고 오묘하다.
 그 갈라진듯한 여섯 줄기의 가운데에 바다 사람들은 서낭당을 지었다.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사람들의 염원은 그렇게 언덕위에서 바다를 향해 푸르고 싱싱하게 아직도 남아있다. 사람들은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풍어제를 지낸다.

 언덕에 올라보면 사람의 공간과 바다의 공간은 확연히 구분된다. 방파제를 기준으로 밖은 사납고 안은 포근하다. 사람들은 그 포근함에 터전을 잡았고 그 밖에서 삶의 수단을 구한다. 멀리서 고깃배 한 대가 삼각의 물살을 데리고 들어온다. 바다와 사람과 황학대가 발아래 보인다. 해송은 그것들을 배경으로 우뚝 선 해신의 모습으로 장엄하고  아름답다.

#조선인의 눈물과 한이 서린 왜성

   
▲ 울산 학성과 서생포 왜성, 부산성을 연결하는 요충지에 축조된 기장왜성.


해송 맞은편으로 죽성리 왜성이 길게 자리 잡고 있다. 왜성은 임진왜란이 다음해인 1953년(선조26년) 6월께 왜장 구로다 나가마사가 쌓았다. 인근 두모포영성을 헐어 울산 학성~서생포 왜성~부산성을 연결하는 요충지로 사용하기위해 축조했다. 왜군의 지휘아래 조선인들의 헐벗은 몸과 마음으로 노역에 끌려나왔고 피와 눈물로 고단했을 것이다.
 왜성은 해발 50m 내외의 낮은 산에 위치했음에도 오르는데 숨이 찰 정도로 가파르다. 산성의 둘레는 약 1km에 넓이는 약 1만 2,000여평이다. 성벽의 높이는 4m에 길이는 약 300m로, 정상은 군대가 주둔할 수 있는 넓고 평평하게 만들어졌다.

 정유재란 때에는 조명연합군에 대적하기 위해 가또 기요마사가 주둔하기도 했다. 이곳에서 조선인의 귀와 코가 소금에 절여져 일본 오사카로 실려 나갔다. 짓밟힌 역사는 치유될 수 없는 상처처럼 아직도 생생한데 그 역사를 딛고 선 사람들은 벌써 잊은 지 오래인 듯 한다.
 왜성 왼쪽 봉우리에 남산봉수대가 있다. 남산봉수대는 고려 성종 4년(985)에 설치해 고종 31년(1894) 갑오경장 때 폐지될 때까지 묵묵히 제몫을 다했다. 이제는 야윈 불꽃마저 지니지 못한 채 허허로운 바람에 몸을 내맡기고 있을 뿐이다.  글·사진=김정규기자 kjk@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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