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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구 달동 휴대폰 거리는 90년대초 울산최초로 이동통신대리점 및 판매점이 형성된 곳으로 성남, 울산대학가 등 휴대폰 매장단지가 여러곳 생긴 지금까지도 꾸준히 '원조'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유은경기자 usyek@ulsanpress.net

'냉장고'로 불리던 크고 시커먼 무선호출기, 카폰, 시티폰, 공짜폰, 터치폰, 스마트폰…. 우리나라의 이동통신 시장은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예전에는 동네에 한 곳 정도 있어 귀한 대접을 받던 전화기가 이제는 한 사람당 한 대 꼴로 손에 쥐어져 있을 정도로 보편화됐다. 핸드폰으로 대표되는 이동통신 시장은 단순한 통화기능을 넘어서 생활 속 깊숙히 자리잡은지 오래다. 최근에는 스마트폰 열풍이 불며 이로 인한 생활 전반의 변화가 다시금 시작되고 있다.

 

  • 90년대초 가전소매점 형태로 자리
  • IMF 이후 상권 성남동으로 양분화
  • 통신사 브랜드바람에 업소 출혈경쟁
  • 온라인 등 시장 다변화 대비해야


울산의 이동통신 즉, 휴대폰 시장은 크게 남구 달동 상공회의소를 중심으로 돋질로에 형성된 달동 상권과 중구 성남동을 중심으로 학성로에 형성된 성남동 상권으로 양분된다. 012, 015로 대표되는 '삐삐(무선호출기)'시절 상공회의소를 중심으로 대리점 및 판매점이 속속 들어서기 시작한 달동 휴대폰 거리는 울산 이동통신의 발원지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도 '달동 휴대폰 거리'는 울산 이동통신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 삐삐에서 스마트폰까지
무선호출은 개통되자마자 우리나라 소비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수도권 서비스에 머물러 있던 차량전화와 달리 서비스 지역이 순차적으로 전국으로 뻗어나가며 지방 수요를 충족시켰고, 비용 면에서도 차량전화보다 훨씬 경제적이였기 때문이다. 이후 신호음과 전화번호를 숫자로 알려주는 서비스가 도입되고, 1991년 망식별 번호 012 도입되면서 1995년말 우리나라 총인구의 12%가 가입하기도 했다.
 처음으로 이동통신 휴대폰이 세상에 첫 선을 보였을 때는 80만원이라는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손에 들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뿌듯함 자체였고, 1994년에는 삐삐와 휴대폰 사이의 공백기를 잇는 상품으로 시티폰(발신전용전화)이 출시됐지만 곧 밀어닥친 휴대전화(PCS:Personal Communication Service)에 밀려 멸종됐다. 1997년 016, 018, 019 등 상용화된 고주파 대역 이동통신 서비스 PCS 폰이 널리 보급되면서 국내 이동통신 시장은 SK텔레콤과 신세기통신, PCS 3사의 5개사가 경쟁하는 춘추전국시대를 맞았다.

 1996년 이전에는 울산은 지금의 상공회의소 주변으로 모토로라 서비스센터점과 SK텔레콤의 울산지점이 있어 이를 중심으로 한 가전 소매점이 형성돼 있었다. 당시에는 지금의 대리점이나 판매점의 개념이 아니라 전기밥솥, 텔레비전 등의 가전제품과 '삐삐'라고 불리는 무선호출기를 함께 판매하는 가전소매점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당시에는 휴대폰 개통이 통신사 지점에서만 가능했기 때문에 달동 휴대폰 거리에 있던 판매점 직원과 업주들은 손님을 가게에 기다리게 한 후 지점으로 서류를 들고 달리기 일쑤였다. 지점에서는 각 매장 등에서 온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진풍경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풍경은 대리점에서 전산 조회를 통해 개통이 가능해지면서 사라졌다.

 초기 PCS 3사는 고성능, 저가, 초소·초경량 단말기로 소비자를 유혹하며 SK텔레콤과 경쟁을 펼쳤다. 이러한 마케팅 전략은 대중들에게 크게 어필했으며 특히 작고 가볍고 다양한 디자인을 갖춘 단말기와 저렴한 요금으로 20, 30대를 중심으로 가입자 수가 빠르게 증가했다. 이러한 경쟁적 마케팅에 힘입어 1998년 6월 우리나라 이동전화 가입자 수는 1,000만명을 넘어서며 세계에서 다섯 번째 이동전화 가입자 보유국이 됐다.
 달동 휴대폰 거리도 1997년 IMF 이후 98년 이동전화 가입자 수 1,000만 시대에 접어들며 세대교체 등의 큰 변화를 겪었다. 울산지역에도 30여곳의 이동통신사 대리점이 생겼고 젊은 층에 학생들까지 '공짜폰'을 사면서 소비층이 넓어지자 달동 휴대폰 거리에만 형성돼 있던 시장은 학생들을 타겟으로 한 성남동 쪽에도 형성, 양분됐다.

 하지만 여전히 구매력이 있는 30대 이후의 세대는 달동 휴대폰 거리를 찾았기 때문에 이곳 역시 매장 수가 크게 늘었다. 당시 매장이 부족하자 모델하우스가 들어서 있던 자리에 건물을 만들어 판매점 등을 차리기도 하며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이처럼 이동통신 시장이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다보니 상가 업주들 역시 주로 나이 지긋한 사람들에서 30~40대의 젊은 층으로 바뀌었다.
 이후 급격히 팽창한 이동전화 시장이 고객 확보를 위한 제살깍기식 출혈 경쟁이 심화되고 단말기 구입 보조금 지급과 각종 특별 판매 행사가 남발되며 10만원 미만의 단말기가 등장하기도 했고, 이러한 경쟁은 달동 핸드폰 거리에도 그대로 투영됐다.

 각 가게는 보조금 지급, 공짜폰 등의 광고판을 내걸고 경쟁적으로 영업했고, 일부 점포에서는 옆 점포에서 가격을 묻고 찾아온 손님에게 위약금을 물어주고 더 싸게 해줄테니 해지하라는 등의 방법을 써 상인들과의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이동전화 사업자 간의 가입자 수 확대라는 외형적인 성장 경쟁이 극한의 상황으로 치닫자 1999년 2월, 5개 이동전화 사업자 간에 이동전화 공정 경쟁 지침에 합의했다.
 각 통신사별 브랜드 콘셉트이 도입되면서 이동전화 사업자들이 내건 브랜드명이 바뀌며 달동 핸드폰 거리의 간판도 바뀌었다. 1999년 신세기통신이 사라지고, 2000년에는 한솔PCS가 한국통신프리텔에 인수됐다. SK텔레콤의 TTL, KTF의 Na, LGT의 카이와 카이홀맨으로 바뀌었던 간판은 최근 SHOW, T, U+로 다시 바뀌었다.
 한동안은 인터넷 쇼핑몰이 발달하면서 핸드폰거리는 역풍을 맞는가 했지만 인터넷 쇼핑몰이 고객의 신뢰를 담보하지 못하면서 다시 제 위치를 찾았다.

 

 

   
▲ 달동 핸드폰 거리 업체들은 온라인 매장 등 시장의 다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더욱 친절하고 믿음직한 서비스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 계속되는 시장의 변화, 이제는 뭉쳐야 산다
 이제 이동통신 기술을 통해 제공되는 무궁무진한 서비스는 내 손 안에 세상을 움켜쥐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됐으며, 이동통신과 관련한 산업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 포진해있다. 울산의 이동통신 시장 역시 달동과 성남동으로 양분되던 시장이 동구 남목, 울산대학교 일대 등 주택가 골목골목에 생기기 시작하는 등 동네 골목상권으로 변모하고 있다.

 여전히 울산시민들에게 '핸드폰 상가'하면 성남동에 형성된 거리와 함께 떠오르는 곳은 달동 핸드폰 거리다. 이러한 현상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달동 핸드폰 거리가 정상적인 판매를 하는 곳, 믿음을 주는 곳이라는 이미지를 쌓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 또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달동 핸드폰 거리 상인들 간의 단합이 필요해졌다.
 이보람기자 usybr@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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