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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님들이 강론으로 설법을 펼치는 무설전. 안에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을 모셨다.

#원효의 그늘 속으로

차갑고 선명한 겨울바람, 손대면 깨질 것 같은 야윈 겨울 햇살속의 산사로 간다. 이 계절 산사로 가는 길은 가볍다. 나뭇잎들을 떨어낸 빈 가지들이 만드는 실루엣 외에는 딱히 시선을 끌지 않는다. 안으로만 집중할 수 있는 '밖'의 풍경이 착하다.
 태백 구봉산에서 발원한 낙동정맥이 마지막 꿈을 영근 곳 천성산(922m). 가지, 운문, 신불, 간월, 능동, 재약산과 어울려 영남알프스의 한 축이다. 그 한켠에 홍롱사와 내원사가 자리 잡고 있다.

 경부고속도로 양산 나들목을 나오자마자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통도사 방향으로 국도를 타다보면 홍롱사 이정표가 보이는 삼거리가 나온다. 우회전으로 외길로 접어들자 몇몇 공장이 마을 입구에 터를 잡았고, 그 새를 빠져나가면 넓은 들과 완만한 산자락이 맞이한다. 작은 찻집과 음식점들이 드문드문한 마을을 지나면 넓은 저수지가 나타난다. 저수지에는 나무데크로 쉴 곳을 마련해놓고 배 모양의 작은 조형물도 설치해 사진 찍는 곳이라는 친절한 안내문까지 달아놓았다. 어두운 물빛 너머로 산자락이 발을 담그고 물새 몇 마리 한가롭게 떠돈다.

 세상이 한참이나 멀어진 듯하다.
 굽이굽이 돌아 천성산 등산로 주차장에서 왼쪽으로 들어서면 홍롱사, 직진하면 원효암에 이른다. 주차장에는 범종모양의 화장실 3동이 서있다.
 불가에서 범종은 잡귀를 물리치고 일체의 번뇌와 근심을 덜어준다는 사물의 하나다. 또 불가에서 근심을 털어버리는 가장 원초적인 장소가 해우소다. 합일된 뜻이 절묘하게 하나로 모였다. 산에 오르든, 절에 가든 이곳에서 근심하나 덜어 낼 수 있다면 큰 행복이다. 관리가 잘되어 깨끗하고 은은한 음악과 범종소리가 볼일(?)을 보는 내내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등산객들이 먼지를 털어낼 수 있는 에어건도 설치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양산시의 작은 배려가 살갑다.
 
   
▲ 푸른 대를 마주 보고선 대웅전. 대숲 아래로 계곡이 흐른다.


#1,000명이 도를 깨우친

나무 숲길을 걷는다. 나뭇가지들이 얽히고설킨 공간위로 하늘이 빼꼼하게 얼굴을 내민다.
 작고 오래된 다리를 건넌다. 콘크리트로 포장된 길 너머로 푸른빛이 경이로운 편백나무들이 줄지어 섰다. 칼바람 속에서 그 빛을 잃지 않는 편백은 곧고 장대해 시원하다. 길은 오르막이지만 가파르지 않고 완만해 편안하고 산이 바람을 가로막아 한결 따뜻하다. 절 입구는 누각 복원공사와 함께 도로 확장 관계로 다소 혼란스럽다.
 오래된 절이다. 신라 문무왕 때가 시작점이니 1300년이 넘었다. 그 옛날 홍롱사는 원효의 그늘아래 있었다. 천성산(922m) 산자락에 89암자가 지어졌고 화엄벌에서 1,000명의 대중이 설법을 들었다. 내원사에서는 야단법석이 열렸다.

 천성이라는 이름 속에는 원효의 도통이 녹아있다. 신라 673년이다. 기장 장안 척판암에서 수행 중이던 원효는 천기를 보았다. 당의 태화사 1,000명의 대중이 장마로 인한 산사태로 매몰될 것을 알고 '해동원효척판구중(海東元曉曉擲板救衆)'이라고 쓴 큰 판자를 날려 보냈다. 그 곳 대중들이 공중에 떠 있는 현판을 신기하게 여겨 법당에서 나오는 순간 뒷산이 무너졌다. 이 인연으로 1,000명이 신라로 와 원효의 제자가 됐다. 중국『송고승전(宋高僧傳)』에 전하는 이야기다.

 원효가 그들이 머물 곳을 찾아 원적산에 89개 암자를 세워 1,000명을 거주시켰다. 그리고 원적산에서 화엄경을 강론하여 모든 승려를 깨우치게 했다.
 이때 화엄경을 설한 자리는 화엄벌이라 하고, 중내원암에는 큰 북을 달아놓고 암자의 대중들을 모이도록 했다고 하여 집북재라는 이름이 생겼다. 야단법석을 열던 천개의 주춧돌이 산자락 어디쯤 있다 한다. 이후 1,000명이 모두 성인이 되었으므로 산 이름을 천성산이라 했다.

 홍롱사는 원효가 1,000명에게 화엄경을 설법할 때 낙수사(落水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는데, 당시 승려들이 이 절 옆에 있는 폭포에서 몸을 씻고 설법을 들었다.
 조선 선조 때까지 영남 제일의 선원이었던 낙수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 소실되고 수 백 년동안 터만 남아 있다가 1910년에 이르러 통도사 법화스님이 다시 중창했고 1970년에 우광스님이 중수를 거듭했다.
 
#화엄의 세계처럼 펼쳐진

절 이름 홍롱은 폭포 이름에서 유래한다. 용이 폭포 아래에 살다가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전한다. 햇빛 좋은 날에 폭포의 물보라가 날리면 영롱한 무지개 피어난다. 그 무지개를 타고 용이 승천했다한다. 양산 8경 중 하나다.
 절집 안내문에는 무지개 홍에 젖을 롱을 써 홍롱사(虹瀧寺)로 쓰고 한글로는 홍룡사로 쓴다. 용(龍)의 오기인지 발음상의 문제인지, 혼용하고 있다.
 1,000명의 성인을 배출한 89암자는 흔적도 없어졌고 지금은 내원사와 성불사, 원효암등 몇 곳만 남아 그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절집 바로 앞 계곡을 가로지르는 반야교를 건너면 오른쪽으로 수정문이다. 수정문 좌우에 주련처럼 걸린 글귀엔 欄外無風竹有聲 난외무풍죽유성 庭前有月松無影 정전유월송무영(난간밖에 바람은 없는데 대나무 소리가 서걱이고, 정원 앞에 달은 떠있는데 소나무 그림자가 없네)라 적혔다.
 부산한 듯 고요한 산사의 정취가 그대로다. 수정문을 거쳐 계단을 오르면 폭로로 이어진다. 
 산비탈을 깎아 만든 계단 왼편에 산신각이 자리 잡고 있다. 산신은 오래전 불교와 결합한 도교의 산물이다.

 산신각을 지나면 신비로운 암벽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그 아늑한 품에 새하얗게 피어난 물의 결정이 눈부시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주저 없이 몸을 던져 허공에다 길을 내는 물의 결연함이 폭포로 되살아났다. 며칠간의 추위로 폭포는 얼었다. 얼음 사이로 가늘어져버린 물줄기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겨울 가뭄으로 암록색 깊은 소는 말라 바닥이 훤히 드러나 보인다.
 폭포는 3단구조로 나뉘어져 있다. 가운데 툭 튀어나온 바위에 물이 비산하면서 무지개가 피어난다. 수량이 많을 때만 가능하다. 천성산의 기운을 품고 돌아온 물줄기가 무지개로 승천하는 찰나의 정점이다.

 폭포 옆에는 관음전이 단아하게 자리 잡았다. 관음전에는 백의관음을 모셨다. 폭포에는 33관음보살중 불구덩이를 연못으로 만든다는 낭견관음이 모셔져 있다는데 아둔한 중생의 눈에는 보이질 않았다.
 소 맞은편에는 연꽃좌대 위에 약사여래가 보인다. 중생의 질병을 고쳐주고 재앙을 소멸시켜주는 부처로 산 아래 를 지극한 눈으로 내려다본다. 늦은 오후의 햇살에 약사여래의 얼굴이 환하게도 밝다.
 관음전 석축과 낡은 철재다리는 교체공사가 한창이다. 석축 하나하나를 등에 지고서 오르는 사람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송하다. 보시의 또 다른 방식이다.
 
   
▲ 홍롱사 오르길의 편백나무숲. 가벼워진 숲속에 홀로 남아 그 청정한 기백을 자랑하고 있다.


# 바람이 불고 풍경이 흔들리고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 대웅전을 만난다. 대웅전을 지나 뒷편 비탈 위에는 무설전이 있다. 무설전은 스님들이 설법하는 장소다. 말로써 경론을 설법한다. 새로 중건된 탓인지 아직 새것의 느낌이 물씬했다. 무설전에는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슬픔과 고통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인간을 향한 연민과 자비의 보살로 중생을 구원하는 천개의 손에는 온갖 도구가 들려 있다. 마당을 건너 계곡의 경계에 청정한 기운의 대나무 숲이다. 그 사이에 작고 아담한 종각이 자리 잡았다. 맞은편으로 새로 지은 요사채가 있다.

 가끔 바람이 불어 대숲을 흔들고 처마 밑 풍경에 매달린다. 맑고 그윽한 풍경소리의 여운이 길다. 바람처럼 흩어지고 때론 스러졌던 삶이 적요한 공간에서 다시 일어선다.
 원효의 자유로웠던 사상이 바람처럼 흐르던 곳. 그 거대한 사상의 집약이 천성산 자락에서 이루어 졌다. 시간은 모든 것을 지우고 다시 쓰기도 한다. 천년의 시간 너머 원효의 화엄세계가 홍룡폭포의 무지개로 현현한 것은 아니었을까. 내려오는 발걸음에 미련이 매달렸다. 글·사진=김정규기자 kj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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